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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09 18:50 수정 : 2018.09.10 09:56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지영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파리 여행을 간단다. 영화 같다. 결국 남는 건 사진일 텐데….’

“소개시켜줄까?”

“뭐?”

“마이 리얼 트립.”

티브이(TV)를 보다 가끔 넋을 잃을 때가 있다. 최근에는 ‘마이 리얼 트립’이라는 애플리케이션 광고가 딱 그랬다. 이 광고가 홍상수의 영화를 본떴다는 사실은 적잖은 사람들이 알아챘을 것이다. 중심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자기 내레이션, 그런 뇌까림과 도통 구분하기 힘든 실제 대사, 오로지 그녀만을 포착하는 카메라, 장면 마무리와 함께 나오는 소소한 배경음악(이라기보다는 악기 소리), 그리고 배우 정유미. 그렇다. 이 광고는 정확히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홍상수 영화가 광고에 접목되다니!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느끼는 곤란함은 한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예술영화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기법들이 어째서 상업문화 안으로 저리도 쉽게 녹아들어가는 것일까. 예술이 익숙한 감각에 대한 배반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퍽 난감한 일이다. 예술은 원리상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을 함축할 텐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예술적인 것이야말로 지배 질서를 더욱 윤기 나게 만드는 구성 요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술영화, 그리고 자본주의 꽃이라는 광고.

아직 이 광고를 보지 않은 독자들이라 해도 친숙한 사례가 없진 않을 것 같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처럼 오늘날 리얼리티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에서 놀라운 지점 중 하나는 이미 그들이 고다르의 영화 수법을 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를 통틀어 손꼽히는 예술영화의 거장 고다르가 촬영장 스튜디오같이 전통적인 카메라 프레임의 바깥을 비췄을 때 그가 노린 가장 중요한 효과는 관객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런 감각 저항의 역사가 언제였을까 싶을 정도로, 오늘날 티브이 프로그램들은 카메라 자체를 기꺼이 비출 뿐만 아니라 연출진조차 프레임 안으로 심심찮게 등장시킨다. 심지어 시청자들조차 이제는 그런 장면을 더 이상 낯설어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이 리얼 트립’이라는 이름처럼 진짜를 보여준다고 선전하는 상업문화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가 진짜를 가리고 허구만을 보여준다고 의심해왔다. 물론 각종 가짜뉴스가 판치는 것처럼 그런 논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지금의 세계는 그 자신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기도 한다. 극적이지 않은가.

면밀히 들여다보면 점입가경일지도 모른다. ‘마이 리얼 트립’은 그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전세계 270여명의 가이드들이 제안하는 나만의 맞춤 여행.’ 소비 감각이 고도화된 현대인들에게 고객 맞춤형 상품과 심미적인 예술 표현 사이에는 어떤 불협화음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개개인의 키치적인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미덕인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논리 역시 소비자에게 커스터마이징된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식의 새로운 문법을 성찰해내고 그럴듯한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다른 대응을 꿈꿀 수 있을까. 결국 끝없는 의문과 질문들만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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