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4.18 16:01 수정 : 2019.04.19 09:22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지난 4년 동안 어쭙잖게 장발장은행장 노릇을 하며 동시대 장발장들의 다양한 사연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발 장관이나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자산 크기에 위화감을 더욱 느끼게 된 것은. “상부구조만 바뀔 뿐 하부구조는 바뀌지 않는다”는 명제를 비스름하게 증명하듯이, 이 점에 한해서는 문재인 정권과 ‘이명박근혜’ 정권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찾기 어렵다. 물론 국가를 사유화하고 각종 농단을 일삼았던 사람들의 세상에서 민주화와 성장의 두 열매를 황금분할로 획득한 능력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바뀐 만큼, 세상이 나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이 존재를 벗어난 의식이나 존재를 배반한 의식을 가진 서민을 비롯한 약자와 소수자는 정치의 주체는커녕 대상이 되기 위해서도 ‘나중’을 끝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지금까지 장발장은행은 6647명(지난 2월말까지)의 개인, 단체, 교회에서 보내준 성금 9억4천여만원과 상환액 2억9천여만원을 합친 12억여원으로 총 664명에게 벌금액을 대출해줄 수 있었다. 한명당 평균 200만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을 대출한 셈인데, 그만한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갇히는 동시대인이 최근까지 매년 4만명에 달했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말해주는 이런 수치는 언론에 잘 소개되지 않는다. 장발장은행은 아주 미미한 기여를 하고 있을 뿐인데, 하나의 사회상으로, 돈 없는 죄인이 재판관의 시선이 두려워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능력 있는 재판관이 죄인을 향해 그가 치러야 할 형벌의 무게를 가늠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겠다.

지난 11일 ‘개혁 역주행 저지,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위한 비상시국회의’ 참가자들은 “촛불 민의로부터 멀어져만 갔던 지난 2년의 경험은, 허울 좋은 적폐세력과의 ‘협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적폐세력과의 ‘협치’는 불가능하고 대신 촛불 민의의 실현만 후퇴시킬 뿐이라는 냉엄한 현실만 확인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실상 적폐세력과의 ‘협치’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집권세력이 이 점을 몰랐을까? 권력이든 돈이든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애당초 급진적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적폐세력의 존재가 촛불민의의 실현을 일정 선에서 멈추게 하는 빌미로 작용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좌파가 아닌데 ‘좌파’라고 호명하고 ‘연금사회주의’ 등을 떠들어대는 적폐세력과의 대치국면에 정치적 시선을 머물게 함으로써 민중의 존재 조건에는 눈길이 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카를 마르크스가 1848년 2월 혁명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지배체제로 왜곡돼갔던 과정을 서술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지적한 “가장 단순한 부르주아적 재정개혁에 대한 요구와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형식적인 공화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사회에 대한 도발로 단죄당하고 사회주의로 낙인찍힌다”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 응수하고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13년 전인 2006년에 이미 한국이 ‘저출생으로 사라지는 나라 1호’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2005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1.08로 떨어진 데 따른 경고였는데, 그 뒤에도 출산율은 계속 추락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에 이미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15살 미만 유소년 인구를 추월하기 시작했고, 2018년 6월 인구동향 발표에서는 출산율이 0.97명으로 전년 평균 1.05명보다 더 낮아졌다. 자기종족 번성의 본능에 반하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적절한 인용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이 어떻든 혹은 어떻게 될 수 있든, 선입견 없이 주의를 기울여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필요시엔 그 현실에 저항하면서”라고 말했는데, 오늘 한국 민중은 주의를 기울여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몸으로 ‘헬조선’의 현실을 느끼고 있고 그와 같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아이 낳지 않기’를 택했다. 출산율 저하가 노동인구 감소, 경제 성장 둔화, 노인 복지 비용 증가 등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는 위정자의 것이지 민중의 것이 아니다.

출산율 저하를 부른 요인으로 부동산 문제, 교육 문제, 일자리(노동) 문제 세가지를 꼽는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문제는 오늘의 지배계층도 그 수혜자들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지배계층과 큰 차이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동산 문제는 그 천문학적 숫자에 의해 민중에게는 일생 동안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다면, 불평등과 불로소득의 주범이기도 한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마땅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가격을 올린 뒤 땜질 뒤처리에 머물렀다. 불로소득의 환수 비율을 높이고 무주택자들에게 내 집 마련의 가능성을 갖도록 하기엔 그들의 능력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워낙 높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칼럼 연재에서 ‘실종된 문 대통령의 교육 공약’이란 제목의 글을 쓴 바 있다. 대선 과정에서 약속했던 교육 공약이 실종되었다는 비판에 대해 집권세력은 아예 무반응이다. 정치적 의지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구태의 행정이 자리잡는 일에서 교육 부문은 가장 앞설 것이다. 근래 ‘진보’ 교육감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완만하게나마 개선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이 점은 외면한 채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떨어진다는 불분명한 수치를 내세워 ‘일제고사 아닌 일제고사’의 실시를 꾀하고 있다. 3년 연속 최대치를 경신하면서 학생 한명당 29만1천원으로 조사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부담은 서민들에게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놀라운 일 중 하나는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을 비준하는 일조차 미적거린다는 점이다. 노동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국제적인 압력을 핑계 삼아서라도 추진할 터인데 “여성, 청년, 비정규직이 사회적 대화의 ‘보조축’”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가 하면, 고용노동부 장관은 ‘경제부처 2중대장’을 자임했던 과거처럼 ‘경영방어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장발장의 처지는 아니더라도 물질적 능력이 부족한 부모라면, 과연 누가 영재학급, 자사고, 특수목적고, 스카이에 들지 못해 ‘2등 학생’으로 자존감도 없이 행복하지 못한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고, 사회에 나가선 집 한칸 제대로 장만하지 못한 채 가진 자들, 힘센 자들로부터 ‘갑질’을 당해야 하는 ‘2등 국민’의 삶을 자식에게 강요할 것인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홍세화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