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30 18:30
수정 : 2019.01.30 19:33
실로 오랜만에 바둑을 두었다. 중학교 1학년 때 3급쯤 두시던 아버지와 장난삼아 25점을 깔고 두기 시작했다. 바둑책에서 본 수를 써서 격파하면 아버지는 그런 수를 어떻게 알았느냐며 놀라는 척도 해주셨다. 정석 책을 외우다시피 하고, 포석, 중반전, 수상전 그리고 사활까지 책을 섭렵했다. 중3 때 어느 날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다가 결국 아버지의 백을 빼앗고, 고2 때엔 아버지가 나한테 5점을 놓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쯤에는 ‘약한 1급’이란 소리를 들었다.
대학 입학 후 그런 ‘바둑’을 잊고 있었는데 한겨레 주주통신원, 문화공간 온 조합원, 한겨레 사우회원이 함께 여는 ‘한겨레 가족 바둑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바둑을 손 놓은 지 오래되는데 지금 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다.
지난 26일 열린 바둑대회에서 대국할 사람과 마주 앉았다. 45년을 안 두었으니 아마도 3~4급 정도가 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고 상대방도 엇비슷한 급수라 하여 호선으로 하고 내가 백을 잡았다. 오랜 세월 두지 않았어도 감각은 참 오래가는 모양이다. 비슷한 상대를 만나서 그런지 팽팽하게 판세가 돌아갔다. 포석 단계를 지나 중반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제법 스릴도 맛봤다. 기왕에 두는 거 이기면 좋겠다는 승부욕도 발동하니 길게 장고하는 일도 생겼다. 거의 다 두었을 때 살펴보니 내가 몇 집 우세한 듯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잠시 ‘이기겠다’는 자만심이 고개를 들 때 방심한 것이다. 상대의 수를 읽었는데, 그 뒤 수를 착각하고 발을 뺀 것이 패착이었다. 졸지에 10여 집이 날아갔다.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다 돌을 던졌다. 패.
다음 대국은 상수를 만났다. 나의 전 상대가 3점을 놓고 두었다 해서 나도 3점을 놓았다. 상수를 만나니 부담감이 느껴졌다. 상대가 한 수를 놓을 때마다 긴장이 됐다. 이 수는 뒤에 무슨 계략을 품고 있을꼬? 앞선 판과는 다른 흐름이 생겼다. 뒤 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오랜만에 두는 티가 났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이겼다. 승.
작은 행복감이랄까, 흥분감이랄까. 승패를 떠나 45년 만에 둔 바둑으로 전혀 생각지 못한 기분을 느낀 하루였다. 이날 참석한 현이섭 한겨레 사우회원(현 한겨레 자문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만남은 한겨레의 주주와 전·현직 사우들이 소통하는 첫 원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대회는 바둑뿐만 아니라 장기·당구·윷놀이도 열렸다. ‘한겨레’를 인연으로 모인 30여명의 한겨레 가족이 종일 쏟아내는 유쾌한 웃음이 이날 추위를 날려버렸다. 한겨레 주주인 덕에 오랜만에 바둑을 두면서 작은 행복도 맛보고 아련한 아버지와의 추억도 떠올릴 수 있었다. 벌써 내년이 기다려진다.
여인철 전 카이스트 감사·연구교수
ymog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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