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10 18:01
수정 : 2018.10.10 18:53
이름 없는 ‘의병’들의 생명을 건 독립운동사를 그린 티브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끝났다. 이정문이 고종에게 “이방인의 눈에 지금 대한은 빼앗길 틈도 없이 내어주고 있나 봅니다. 하여 신은 싸울 것입니다. 쉬이 손에 쥘 수 없음을 보일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사랑과 생명을 다해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한 이들의 결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 그들은 모두 사랑 속에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살던 민초였고, 그들이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세력은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이 나라의 분단을 주도하고, 그들의 후손들은 정·재계는 물론 학계, 언론계까지 장악하여 오늘의 반민족, 빈민초 악행을 자행하고 있다. 이 나라의 ‘독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유다.
“임진년 의병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이 을미년에 의병이 됐다. 을미년 의병의 자식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라는 일본군 장교 다카시의 말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가족사가 떠올랐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은 조선 말 연변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 ‘도태’였다. 청나라가 연변으로 중국인들을 이주시키는 ‘간도정책’을 쓰자 연변 땅에서 한족을 내쫓으며 “연변이 조선 땅”임을 천명하고 저항했다. 비록 청나라군에 패해 감옥에 갇히고 가세가 기울었으나 증조할아버지는 아들들을 민족주의자로 기르셨다.
아들 3형제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은 1905년 을사늑약을 당하자 목숨을 건 무장투쟁을 결의했다. 특히 사업 능력이 뛰어나 간도 제1의 거부가 된 할아버지 최운산은 전 재산을 털어 민초들을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했다. 민초들을 모아 봉오동에 창설한 독립군부대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가 1920년 일본 정규군과 대결한 독립전쟁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우리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선물한 할아버지 3형제는 연해주와 북만주을 넘나들며 해방이 될 때까지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최운산 장군의 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박정희의 독재에 반대해 옛 민주당에서 부산지역 지구당의 핵심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다.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와 1987년 6월 시민항쟁, 2016년의 촛불시민혁명 시대를 사는 나는 경실련을 시작으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4대를 관통하는 저항정신은 자연스럽게 우리 형제들을 <한겨레> 주주와 독자로 묶어주고 있다. 큰오빠(최윤주)는 창간주주요, 둘째 오빠(최흥주)와 동생(최은주)은 열혈독자이고 나도 한겨레 주주 독자다.
사실 <한겨레>도 민초들의 저항의식의 산물이다. 수많은 민주투사가 독재정권의 패악에 저항할 때 주요 언론들이 정권의 나팔수 또는 기관지로 부역했다. 그때 민초들에 의해 창간된 <한겨레>는 진정한 민초들의 목소리였다. 지난 30년 동안 <한겨레>는 외면당하는 민초들의 삶을 드러내고 공론의 장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왔다. 하지만 민초들이 만들어간 저항의 역사는 아직도 왜곡되고 가려져 있다. 분단과 이념대립, 역사학의 더딘 발전 탓이다.
특히 만주에서 일어났던 무장 독립전쟁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민족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역사적 진실이 제대로 복원되길 기대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역학관계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70년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는 이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민초들의 반외세, 반민주 투쟁사를 <한겨레>가 더 열심히 찾아내고 응원해주길 바란다.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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