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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9 14:32 수정 : 2019.10.29 18:09

28일 오전 동 터오는 평양 시내. 차례로 촬영한 사진을 이어 붙였다. 평양/이정아 기자

28일 오전 동 터오는 평양 시내. 차례로 촬영한 사진을 이어 붙였다. 평양/이정아 기자

`평양, 조선의 심장'

2019년 10월 평양의 가을에 사람들은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아래 후두둑 떨어진 낙엽과 열매를 부지런히 쓸어내고 있었습니다.

인민복 차림의 젊은 아버지는 왕관 머리띠를 곱게 얹은 어린 딸을 등에 업고 길을 건넜고, 그 곁에서 똑같은 차림새의 큰딸 손을 잡고 아내가 함께 걸었습니다.

`조선의 심장, 평양'에는 `모든 것을 우리 식대로', `일심 단결'해 `최후 승리'를 이루겠다는 북쪽의 다짐이 건물 꼭대기마다 궁서체와 고딕체로 쓰여있었고, `련못동-평양역'이라 그 노선을 알리는 2량 연결 노면 전차는 하루 일을 마친 평양 시민들을 가득 싣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2019 평양 아시아 유소년·주니어 역도 선수권대회 취재를 위해 지난 18일 평양으로 출발하며 어느 정도는 2019년 평양의 가을을 사진을 담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도착해보니 상황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처음부터 북쪽의 연락관은 “남과 북의 사이도 좋지 않은데 경기만 치르고 가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이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도록 좋은 숙소와 훌륭한 음식이 풍족하게 제공되었고,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위한 사우나 등도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선수단에게는 자유롭게 제공된 무선통신도 남쪽에는 예외였고, 이동도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취재는 숙소와 경기장 내부에서만 가능했고, 취재 마감을 위한 인터넷 연결도 제한적이었습니다.

2019년 10월 21일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 들머리에 걸린 북쪽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초상화에 불이 밝혀져 있다. 평양/이정아 기자

일정 중반에 접어든 어느 오후, 주요 사진 취재 포인트에 접근하지 못하고 경기장의 남쪽 선수단 자리에서 사진 취재를 하고 있던 기자에게 북쪽 `안내 선생'이 다가와 “다음에는 남북관계가 좋은 시절에 와 이런 수모를 겪지 말라”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게 제뜻대로 되는 일입니까”라는 답을 속으로 삼키는 기자에게 그는 “어제 우리 원수님이 금강산에 다녀오셨다”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지난해에는 정말 남쪽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인사를 하게 되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평양에서 판문점이 어디라고 옥류관 냉면을 대접하러 달려가겠냐,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오셨을 때에도 백두산까지 모시고 갔다”며 목소리를 높인 그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이야기하며 “사실 우리가 어디 미국 앞마당에 돌멩이 하나 던져본 적 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도 핵을 폐기하라고 하니 애써 만든 그 시설들을 폭파시켰고, 10년 넘도록 금강산이 저 지경으로 방치되어 있는데도 "피가 물보다 진하니 기다려주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강한 의지를 보였던 금강산 관광 재개가 불발된 것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며 “이명박 정부 때 막은 일을 왜 현 정부는 풀 생각이 없는 것이냐”고 강한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지난 25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청년들이 족구를 하고 있다. 평양/이정아 기자

이번 대회에 남쪽 선수단을 초청하며 북쪽은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정치와 선을 긋자”고 했지만, 사실 그 방침을 먼저 어긴 것은 북쪽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남쪽 선수단을 특별대우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북쪽의 불편한 심기를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마다 내걸린 붉은 손팻말에 쓰여진 여러 문구 중 하나처럼 `인민 생활의 향상'을 위해 한시가 급한 것이 북쪽의 상황이나 북쪽이 레드라인만 넘어서지 않는다면 미국이나 남쪽도 북쪽처럼 절박하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화 끝자락에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하냐”는 그의 한탄 같은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능력도 기자인 제게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이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을 지켜주는 것으로 북쪽에 대한 저의 존중, 최소한의 성의를 표하는 수밖에요.

지난 19일 평양 미래과학자거리 뒤로 노을이 지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한겨레 이정아

지난 22일 평양 동대역 구역의 주체사상탑이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평양/이정아 기자

지난 24일 양각도국제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중구역 일대에 안개가 끼어 있다. 평양/이정아 기자

지난 21일 평양 시내 야경. 멀리 105층 류경호텔 외벽에 선전화가 비춰지고 있다. 평양/이정아 기자

2019년 10월 28일 오후 평양 시내. 평양/이정아 기자

2019년 10월 19일 평양 양각도국제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시내. 평양/이정아 기자

태어나 처음 찾은 평양의 취재파일은 호텔 창밖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다 취재한 이 몇몇의 전경 사진들 외에는 우리 청년들의 `역도'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이번 취재는 이렇게 매듭짓지만, 천리마·만리마의 속도로 한반도 평화가 달려올 내일을 소망합니다. 그 때에는 북쪽 선수들의 경기를 사진 찍는 기자에게 “값도 안 내고 이렇게 막 찍어간다”며 농담을 던지던 안내 선생에게 보답할 기회를 꼭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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