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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26 17:02 수정 : 2007.02.26 17:03

조정래/작가·동국대 석좌교수

조정래칼럼

다섯 사람이 작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돈을 뺏었습니다. 그렇게 죽인 사람이 대여섯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그들과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전혀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유식한 말로 하자면 그들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살인행위를 자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목표로 한 액수는 수십억원이었다고 합니다. 10억원을 모으기 전에 대여섯을 죽이고 잡혔기에 망정이지 …. 만약 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키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요. 이건 어떤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막연한 상상도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잊었을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사형제 폐지가 세계적 조류라고 합니다. 국제기구인 유엔이 그 결의를 했고, 세계 여러 나라 종교단체들이 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민생법안 통과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이 나라 국회에서도 엉뚱하게 그 문제에는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인도주의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최상의 창조물이고 지고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인도주의가 피워내고자 하는 꽃송이 중의 하나가 ‘사형제 폐지’입니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가 세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20여년 전부터 저는 작가로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지만,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좀 생각해봅시다. 앞에서 예로든 다섯이 대여섯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 사람이 그뿐일까요. 그들은 그 유가족들까지 ‘간접살인’했습니다. 유가족들이 받은 상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어린자식들의 인생이 망쳐져버렸다면 그보다 큰 겹살인은 없을 것입니다.

‘사형제 폐지’는 그런 사람들까지 살려주자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범죄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고 대들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그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권과 목숨을 ‘내 목숨처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는데 닥치는 대로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형제가 있어도 살인이 줄었다는 증거가 없다.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다.’ 이것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그지없이 인도적이기는 하나 좀 단순하고 무책임합니다.

그럼, 사형제가 없어져도 살인이 늘지 않는다는 보장을 무한책임으로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하는데, 그 ‘진심’의 잣대가 무엇이며,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인권은 누가 책임지는 것입니까. 또한 유가족들의 통한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사형제도의 악용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적 제거용이나 통치수단의 하나로 쓰는 경우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형제도의 정치적 악용은 끝없이 자행되어 왔습니다. 저도 사형제 폐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경우를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와 슬기는 그 두 경우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법은 구속인 동시에 우리의 공동체를 엮어가는 울타리입니다.


조정래/작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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