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0.06 17:55 수정 : 2018.01.08 11:16

나는 우리나라에서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와 같은 원전 사고가 일어나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그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고로 인한 절망적 파국을 견뎌낼 자신도 용기도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표현을 빌리면, 그때는 “세계는 죽었다”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행동도 허용하지 않는 묵시록적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시인 고은 선생이 최근 <초혼>이라는 시집을 내고,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가진 모양이다. 그중 한 인터뷰 기사는 시인이 “죽은 이들의 넋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살아있는 자들도 어루만졌다”면서 최근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조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경향신문> 2016년 10월4일자). “(나라를 떠나는 것은) 이 시대만의 특별한 현상이라고 볼 순 없다… 어떤 경로로 해서든 가혹한 현실을 못 견뎌 살길을 찾아 떠나온 게 인류의 역사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며, “조선 말기 강 건너는 사람을 처형했을 때도 두만강을 기어코 건너 삶의 터전을 만들다 보니 오늘날 동북 삼성 조선족 사회를 이뤘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를 건너 뗏목을 타고 호주까지 갔을 때 짐승과 같은 몹쓸 환경에서 더 좋은 데를 찾아간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게 다 그런 것이다.”

하기는 인간의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역사라는 것은 끊임없는 이동과 교류의 과정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을 두려워할 것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런 낯선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을 뜻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 큰 생각’이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까? 백년, 천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인간의 삶을 장대한 캔버스 속에서 보는 시인과는 달리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삶이 오랜 세월 뒤에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질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생존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지 하루하루 고통과 번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흥밋거리가 될 리 없다. 그리고 말이 좋아 이민이지, 사람이 자기 고향과 가족과 벗들을 떠나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뿌리 뽑힘을 각오하고 일종의 자기추방이라 할 수 있는 이민을 결행한다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오랫동안 남한의 중상류계층 사이에 열병처럼 유행하던 미국행과도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 젊은이들의 상당수-아니 어쩌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안정된 일자리와 가족생활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채 생애를 마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지금 이 나라의(소위 야당 정치인들까지 포함한) 지배층은 특권계급으로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의 유지와 확대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자조하고, 이민을 가야겠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지 실제로 떠나겠다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가까운 젊은이들에게 이민을 권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심지어(이 나이에도 가능하다면) 나 자신도 이민을 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정말이지 미세먼지 때문에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다. 왜 이렇게 미세먼지는 갈수록 심해지는가? 미세먼지가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는 날은 생의 의욕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다. 더욱이 미세먼지로부터 해방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고통스럽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아니 우리 자식들이 살다 죽는 날까지도 이 미세먼지 지옥은 지속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푸른 하늘이 열려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내가 가장 다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자력발전소 문제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와 원전당국은 진즉부터 활성단층대임을 인지했음에도 그 위에 원전들을 조밀하게 세웠고, 또 그 인근에 핵폐기물처리장까지 만들었다. 더구나 이제 한반도도 지진 염려가 없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지금부터 지진활동이 왕성해질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도 뚜렷해졌다. 그런데도 원전당국은 이 심각한 잠재적 위험에 대하여 강 건너 불 보듯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위험지대에 추가적인 원전 건설을 고집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한 일본인 지진 전문가는 지난 9월의 경주 지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지진이 경주 인근에서 3~4개월 후 발생할지 모른다는 충격적인 예측을 했다. 이 불길한 예측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규모 6.5의 지진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한국의 원전들이 조만간 붕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우리나라에서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와 같은 원전 사고가 일어나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그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고로 인한 절망적 파국을(상상 속에서라도) 견뎌낼 자신도 용기도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표현을 빌리면, 그때는 “세계는 죽었다”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행동도 허용하지 않는 묵시록적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생각해보자. 선량한 시민들이 이런 걱정으로 밤잠을 설쳐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최소한의 이성과 상식이 살아 있는 사회라면, 원전 문제는 후쿠시마 사고가 났을 때 독일에서처럼 정리되었어야 마땅했다. 즉, 합리적인 공론을 받아들여 국가가 원전의 단계적 폐쇄를 결정하고, 대안을 강구했어야 했다. 한꺼번에 안 되더라도 적어도 방향은 그렇게 잡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여 ‘원자력 강국’이라는 자멸의 길로 뛰어들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습성은 지금도 강고하게 계속되고 있다. 이 완고한,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비단 원자력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부터 이 나라의 통치 시스템 전체를 관류하는 기본원리가 돼버린 것으로 보인다.

나라꼴이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말할 것도 없이, 나라를 통치하는 집권세력이 국가라는 것을 사유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결정해버리는 일이 당연지사로 발생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불순세력’으로 규정·겁박하는 몰상식한 짓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성적인 언어, 공론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나라가 돼버렸다.

그런데 나라꼴이 이렇게 된 것은 과연 국가권력의 무지몽매한 전횡에만 그 원인이 있을까? 무엇보다 큰 책임은 능동적이든 소극적이든 불의한 권력행사를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해온 지식인·전문가·과학자들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자력 문제뿐만 아니다. ‘4대강살리기’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생태적 보고를 파괴할 때에도, 천안함 침몰 때에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도, 그리고 지금 백남기 선생의 사인을 둘러싼 공방에서도, 늘 거기에는 전문가·과학자의 양심 문제가 개재돼 왔다. 하기는 인생사에서 양심은 대체로 욕심보다 힘이 약하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자들이 권력과 자본에 굴종적이거나 친화적인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현대과학은 거대화·상업화함으로써 국가 및 자본과 친밀하지 않고는 존립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과학자도 인간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을 ‘좋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불의한 나라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논어)이라는 선현의 말씀을 이해할 귀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종철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