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⑦ 효와 국가
인간은 모두 동의 없이 태어나지만
태어나고 나면 누군가 삶을 책임져야
공자의 관심은 효 자체보다
삶의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논어’의 효의 대상은 소규모 가족
과도한 국가 활동은 제한하는 쪽
교육·복지·육아·노인돌봄 해결방안
바뀌는 시대 맞춰 새로운 답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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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속 공자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집안에서 부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혹은 자식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효성스러운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리어카에 폐지를 모아 끌고 가는 한 노인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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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의 주인공 윤아. 윤아의 엄마는 19살에 윤아를 낳았다. 19살. 얼마나 의도한 임신이었을까. 공동 번역 성서 창세기 3장은 말한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윤아 엄마는 남편을 주무르거나 손아귀에 들 계제조차 없다.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탄광촌으로 노름을 하러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근근이 식당을 운영하며 윤아를 키워야 한다. 윤아가 고교생이 되자, 식당을 오가던 유부남과 정분이 나서 또 아이를 낳는다. 얼마나 의도한 임신이었을까. 책임을 회피하며 유부남이 여행을 떠난 사이, 편의점에서 시급을 받으며 일하던 윤아는 신생아실로 동생을 만나러 온다. 인큐베이터 안의 미숙아 동생에게 말을 건넨다.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 힘내!”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질문이기에, 그것은 마치 윤아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
아무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윤아가 태어날 때 윤아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윤아 동생을 인큐베이터에 넣을 때도 아무도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산다는 거 상당히 ‘빡센’ 일입니다. 미숙아들은 체력이 약하곤 하다는데,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당신 부모는 법적 부부가 아닙니다.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라져 소식 두절 상태입니다. 어머니 쪽 재산 상태는 꽤 좋지 않습니다. 산후에 라면을 끓여 먹을 정도죠. 그래도 살아보시겠습니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거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시면 오른쪽 빈칸에 표시하고 동의하지 않으시면 왼쪽 빈칸에 체크하세요.”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사회계약론 같은 것은 삶의 출발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에게 마치 계약 사항을 이행하라는 조로 효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대꾸할 것이다. “그러게 누가 날 낳으랬나?” 이 난감한 말대꾸에 요령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리학은 섹스와 유사하다. 둘 다 결과물을 산출하기는 하지만, 우린 결과물 때문에 그걸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섹스를 했다기보다는, 섹스를 하다 보니 아이라는 결과물이 산출된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의도된 출산도 있다. 김승옥의 소설 <환상수첩>에서 집에서 화초나 가꾸며 소일하는 아버지는 갑자기 자식들을 불러서 말한다. “내가 왜 너희들을 만든 줄 아느냐? 하, 이놈들, 외로워서 그랬다…. 그나저나 하여튼 미안하다.” 외로운 인간들에게 점점 출산은 자의식으로 충만한 개인적 선택이 되어간다. 의료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계획 임신을 시도할 것이다. 정자와 난자를 냉동한 뒤 가장 적절한 때에 “결과물을 산출”하려 들 것이다.
진짜 문제는 결과물이 산출된 다음에 시작된다. 태어나고 나면 누군가 그 삶을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가 나누어 감당할 것인가? 이것이 생존의 진짜 문제다. 영화 <미성년>의 대사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아버지는 도망갔고, 엄마 식당은 불황이고, 사회보장제도는 충분하지 않고, 언니는 편의점 알바 하느라 정신이 없단다. 즉 가족, 사회, 국가 모두 네 삶을 크게 도와줄 만한 형편은 아니란다. 사는 거 되게 빡세다. 각오는 돼 있어?”
신생아실을 나온 많은 이들에게는 “빡센” 삶이 기다리고 있다. 입시 지옥을 거쳐 가까스로 취직을 하고 나면, 야근으로 점철된 격무가 기다린다. 지쳐 있지만 외로워서 가족을 만든다. 야근이 길어질수록 가족 사이는 서먹해진다. 관계를 회복해보고자 고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 세번 연속 놀이공원 롤러코스터를 타본다. 장성한 아이는 “그러게 누가 날 낳으랬나?”라며 방문을 쾅 닫고, 노쇠한 부모는 공자님 말씀을 들먹여가며 효도를 요구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40대 이상에게는 주 3일 근무가 적절하다는데, 이 모든 삶의 책임을 혼자 지려면 주 3일 근무가 아니라 주 3일만 살아 있는 게 적당할지 모른다. 주 7일간 다 살아 있으려면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가 어떻게든 삶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공자, 효와 충성을 양립시켜
공자는 효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주장했거나, 효에 대해 이론화를 했거나, 자기 가족 내 효의 실천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논어> 속 공자는 시종일관 자기 부모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며 자식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君子遠其子也) 공자가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집안에서 자기 부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식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효성스러운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앞서 말한 삶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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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교육, 복지, 육아, 노인 돌봄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조건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시대마다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경남 하동군 노량실버타운에서 한 어르신과 직원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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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고립되어서는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대규모 친족 조직이 지배층에게 그러한 생존의 터전을 제공했고, 지배층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 가문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공받았다. 이러한 친족 질서를 효(孝)라는 가치와 예(禮)라는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규율해준다면, 제3자인 국가가 법률을 통해 개입할 여지는 크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 필요가 없다.
공자는 친족 간의 유대와 효가 아직 꽤 중시되던 춘추시대에 살았다. 다른 한편, 그때는 친족 질서가 차츰 약화되고 국가의 힘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논어>에 실려 있는 섭공(葉公)과 공자의 대화를 보라. 먼저 섭공이 공자에게 자랑한다. 자기네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면 자식이 아버지를 숨겨주지 않고 법정에 나가 증언해서 올바름을 세운다고.(其父攘羊而子證之) 공자는 맞받아친다. 가족끼리는 그렇게 서로 고발하지 않으면서도 올바름을 실현할 수 있다고.(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즉, 섭공은 국가가 아버지와 자식 관계에까지 개입하여 정의를 구현한다는 점을 자랑하는 한편, 공자는 국가 개입 없이도 가족 내에서 구현할 수 있는 올바름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섭공의 시각에서 보자면 가족은 편파적이고 사적인 영역인 반면, 국가는 공적 질서의 유일한 책임자다. 따라서 국가는 공적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가족 내의 사안에도 기꺼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 효를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더 우선시한다면 통치자의 정치적 권위는 흔들릴 것이다. 섭공의 주장에 대한 공자의 반응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자가 효를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양립 가능한(compatible)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어떻게 친족 간의 효를 국가에 대한 충성과 양립시킬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키스 냅이 지적한 바 있듯이, 단순히 효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공자 사상의 특이점이 아니다. 공자에게 그나마 새로운 점이 있었다면 공자는 효의 대상을 대규모 친족 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 단위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족보 같은 걸 만들어가며 친족을 대규모로 관리하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조상신 덕 보라고 한 적도 없다. 즉 공자가 중시한 가족은 거대한 문중 조직 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친족 조직에 대한 헌신(孝)은 국가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효의 대상이 대규모 친족 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이 되자, 효라는 덕성은 더 이상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대규모 친족 조직과는 달리 소규모 가족은 통치자에게 도전할 만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친족이 대규모로 조직화되지 않고 소규모로 파편화되어 있는 한, 통치자에게 쉬운 지배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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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 나면 누군가 그 삶을 책임져야 한다. 그 책임의 어느 부분을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가 나누어 감당할 것인가, 이것이 생존의 진짜 문제다. 병원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 있는 신생아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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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적 합의 필요?
공자가 국가가 지배하기에 상대적으로 용이한 소규모 가족 단위를 중시했다는 이유로 공자를 국가주의의 선구자쯤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논어> 속 공자는 대개 국가의 과도한 활동을 제한하는 편이었다. 실로 <논어>에서는 과도한 세금징수나 국가의 무력수행 등에 반대하는 공자의 언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인들이 국가가 의당 처리해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안, 이를테면 가족 내의 분쟁 조정이나 복지조차도, 가족 내에서 처리하겠다는 태도를 공자는 보여준다. 비국가 영역이 많은 사회적 기능을 떠맡는다는 점에서,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국가는 ‘작은 국가’임에 틀림없다. 공자의 이상 국가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덕을, 바람직한 성정을 기를 수 있는 공동체이지, 법이 삶의 국면마다 개입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다.
일상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위생, 교육, 복지, 육아, 노인 돌봄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 가운데 누가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나누어 맡아야 하는가. 이는 공자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인류가 고민해온 문제이며 매 시대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시대마다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새로운 답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동의 없이 태어나고, 많은 노인들이 동의 없이 요양원으로 실려 간다.
5월13일치 <한겨레> 기사를 보면, 현재 한국의 요양원 대다수는 죽음의 길로 방치되는 현대판 고려장에 불과하다. 평생 위태롭게 지켜왔을 삶의 존엄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어 버리게 되는 곳. 사전 동의 없이 시작된 삶이었으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삶이었으나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결국 물건이 되고 마는 곳. 이 사태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가족 내 효 실천을 넘어서는 국가의 좀 더 조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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