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③ 공자의 실패
공자와 그 제자들은 당대의 운동권
‘예’라는 화살을 들고 정치에 반기
전쟁의 시대에 맞지 않았던 비전
승리보다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
한당 시대 정치인과 지식인들
‘논어’를 대안이데올로기로 선택
명나라 과거시험의 필수과목 정착
실패자의 텍스트, 기득권 텍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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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의 제자들 역시 그 시대 거리에 나선 운동권들이었다. 그들 역시 부패한 시대를 개탄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었으나, 386세대와 달리 집권에 실패한다. 사진은 2009년 6·10민주항쟁 22돌을 기념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광장을 메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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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취조관들은 박종철에게 수배 중인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는다. 선배의 행방을 끝내 말하지 않던 박종철은 구타와 물고문으로 비극적인 사망에 이르고 만다. 그러자 당시 정부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발표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그 불합리한 해명을 들은 시민들은 분노했고,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타올랐으며, 집권 세력은 결국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약속한다.
군부독재 타도의 구호 아래 쟁취한 직선제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정권을 잡은 노태우의 민정당은 국회에서의 약세를 만회하기를 갈망했고, 당시 원내 3당에 머물던 통일민주당 총재인 김영삼(YS)은 이에 부응한다. 그리하여 1990년 1월 이른바 (혹자는 3당 야합이라고 부른)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이 출현한다. 이리하여 한때 민주투사였던 김영삼은 쿠데타 주역이 이끄는 여당의 일부가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중학교 때 간직했던 대통령의 꿈을 기어이 이룬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 뒤 한때 운동권이었던 386세대 일원들은 차례차례 기득권의 일부가 되어간다. 위장 취업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김문수는 “혁명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하고 보수 정계에 입문한다. 박종철이 죽음에 이르는 고문 속에서도 보호하고자 했던 운동권 선배 박종운 역시 박종철을 고문했던 정권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실패한 운동권, 공자
이처럼 폭력과 저항과 변신으로 얼룩진 민주화 과정 덕분에, 시민들은 전에 누리지 못한 사상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쇠락 소식과 함께 그전까지만 해도 음성적으로 유통되었던 ‘불온서적’들이 공개적으로 출판된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1987년까지 금서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도 1989년 김남주에 의해 번역되어 출간된다. 억압 속에서 몰래 돌려 읽어야만 했던 브레히트의 작품도 정작 민주화가 되고 나니 인기가 전과 같지 않다. 이제 소위 민주화의 주역들이 기득권이 되어 이 나라의 많은 자원을 향유하게 된 2019년, 새삼 한국 정치사를 추억하며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읽어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민주화가 끝나고 다시 읽는 브레히트의 시는 불온한 언어라기보다는 그저 달콤한 사랑의 밀어로만 들린다.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브레히트. 그는 이제 혁명을 위하여 고문을 감수하기는커녕, 연인을 위하여 솜털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히 존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물고문이 아니라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몸을 사리는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 되었다.
빗방울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그만 빗방울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브레히트에게, 386세대의 고교 윤리 선생이 다가온다. 최지룡의 만화 <여로>에 나오는 작업반장이 외국인 노동자 핫산을 구타하듯이, 그는 브레히트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똑바로 서라, 핫산, 아니 브레히트! 어째서 빗방울이 머리에 튀었다고 신음하고 있나!” 갑자기 빗방울보다 윤리 선생의 매질을 더 두려워하게 된 브레히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 조심하다 보니… 아니, 시를 쓰려다 보니… 아, 망할, 잘못했어요.” 빗방울을 맞아 사랑하는 데 지장이 생긴 브레히트의 머리를 윤리 선생이 가격하며 소리 지른다. “너희 시인들은 항상 밑도 끝도 없이 예민하다! 여긴 한국이야! 너희들처럼 예민해서는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나?” 구타가 끝나자, 브레히트는 외국인 노동자 핫산처럼 중얼거린다. “이것이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사랑의 매인가. 왜 한국 선생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매를 사랑한다는 본심을 숨기지 않는 것일까.”
1980년대 어느 고등학교의 윤리 교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유교 사상의 연원과 전개’와 ‘동양과 한국 사상의 현대적 의의’. 공자의 사상과 그것이 한국 사상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려는 찰나, 엎드려 자고 있던 학생이 선생의 시야에 들어온다.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던 학생에게 살금살금 접근하는 데 성공한 우리의 윤리 선생. 그는 책상을 탁 치는 대신, 엎드린 학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학생은 억 하고 깨어난다. 선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학생에게 선생은 속사포처럼 가르침을 퍼붓는다. “똑바로 앉아라! 졸린다고 해서 어째서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나! 너희 학생들은 항상 게으르다! 여긴 한국이야! 너희들처럼 게을러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나?”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고시라도 떨어진 적이 있는 것일까. 그의 고함에는 울분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뒤통수를 맞고 갑자기 깨어난 학생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 자신이 지금 교실에 있는지 대공분실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공자는 자고 있는 학생을 패지 않는다. 공자는 심지어 자고 있는 새마저 쏘지 않는다.(?不射宿) 그런 짓은 예(禮)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다면, 혹은 새를 그저 많이 잡는 것이 야심이었다면, 깨어 있는 새는 물론, 자고 있는 새,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을 믿고 오늘따라 일찍 일어난 새, 그리고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까지 활을 쏘아서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질없는 경쟁에 임하지 않는다.(君子無所爭) 꼭 경쟁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활쏘기 정도이다.(必也射乎) 논어의 이 구절에 대한 오규 소라이(1666~1728)의 해석에 따르면, 활쏘기란 누가 과녁을 잘 맞혔느냐, 혹은 누가 많이 쏘아 잡았느냐의 경쟁이 아니라, 누가 활 쏘는 과정에서 예를 더 잘 구현했는가의 경쟁일 뿐이다.(貴禮不貴財, 不欲必獲) 과녁의 명중 여부가 아니라, 누구의 용모와 동작이 더 우아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경쟁이라야 군자답다고 할 수 있다.(其爭也君子)
그래서 공자는 오직 깨어 있는 새만 쏜다. 깨어 있는 새라야 화살을 피해 짹짹거리며 날아갈 수 있다. 비록 새를 잡지는 못했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활쏘기 과정에 구현된 예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의 그 학생은 자고 있었기에, 날아오는 ‘사랑의 매’를 피할 수도 없고, 짹짹거릴 수도 없고, 자다가 맞았기에 왜 맞았는지 알 수도 없고, 그 광경을 본 다른 학생들은 그 체벌 혹은 구타 과정에서 예를 배울 수도 없다.
예를 지키는 일은 전장(戰場)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길을 따르고자 했던 맹자는 전장에서도 예를 지켰던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일화를 전한다. 자신이 쫓던 적장 자탁유자(子濯孺子)가 병이 나서 활을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유공지사는 활쏘기를 배운 선생의 도를 거론하며, 활을 뽑아 수레바퀴에 두들겨 금속촉을 빼고 네발을 쏜 뒤에 돌아갔다.(抽矢?輪, 去其金, 發乘矢而後反)
공자와 그의 제자들 역시 그 시대 거리에 나선 운동권들이었다. 화염병 대신, 금속촉을 뺀 예라는 이름의 화살을 들고서 당대의 정치에 반기를 든 이들이었다. 그들 역시 부패한 시대를 개탄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었으나, 386세대와는 달리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집권에 실패한다.
진정한 공자의 계승자는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들의 실패는 어쩌면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가 통치하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것이다”(孔子爲政必?)라고 경쟁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The Discourses)에서 “사람들의 이기심은 능력자가 중요한 일에 필수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공자(기원전 551~479)가 정치적인 권력을 쥐었다고 한들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살던 시대는 만성적인 전쟁의 시대. 전국 시대(기원전 403∼221)에 이르면 진나라 통일 전까지 적어도 590회의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공자가 그때까지 살았던들 그 추세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그와 같은 전쟁의 시대에 금속촉을 기꺼이 빼고 활을 쏘는 것 같은 비전은 시대가 원하던 부국강병책에 맞지 않을 운명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공자나 그의 제자들은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아는 사람들(知其不可而爲之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력에 의존하여 천하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말했듯이, 그들은 승리하기보다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새를 맞히지 못할지언정 자는 새를 쏘지 않는 이의 위엄, 자청해서 실패를 선택하는 이의 위엄, 기어이 성취를 포기하는 데서 오는 위엄이 그들에게는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천하의 통일은 예를 통한 통치보다는 전쟁 기계로서 국가의 강화를 추구한 이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진시황제의 독재정치가 가속화되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좋아했을 법한 운동권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된다.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 통제에도 불구하고, 통일왕조 진(秦)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무너진다. 진나라가 단명하자, 지식인들은 왜 그토록 강했던 진나라가 그토록 빨리 망하고 말았는지 원인을 찾고자 골몰한다. 진나라의 실패 이후, 한당(漢唐) 시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는 과정에서 <논어>는 정부에 의해 지원해야 할 텍스트로 마침내 채택된다. 그 뒤에도 정부의 간헐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다가, 진시황에 버금가게 독재권을 휘둘렀던 명나라 초기 황제들에 의해 <논어>는 과거시험이라는 공무원 고시의 필수과목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한때 운동권 서적이었던 책이 본격적인 고시 수험서가 된 것이다. 실패자의 텍스트가 기득권의 텍스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끝내 국가 관료제의 외부에 남기를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많은 386세대 운동권이 집권 세력의 일부가 되었지만, 소수의 운동가들은 여전히 집권 세력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어딘가에서 자기 나름대로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공자의 계승자라고 자임하면서 국가 권력 밖에서 활동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다름 아닌 과거시험에 낙방한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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