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⑨ 스펙터클의 정치
지배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두드러지도록,
피지배층이 초라하고 단조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간,
그 피지배층은 지배층의 지배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감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권위자 와타나베 히로시 교수에 따르면, 일본 에도시대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인정하게 되면, 그 초월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권위를 넘보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적 존재에 호소해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대신, 그저 무력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해 나갔다. 그런데 전쟁에 이겨 정작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도쿠가와 정권은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한 무력을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가 되자, 문민정부가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처럼. 실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도쿠가와 정권 지배자들은 대신 단지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데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제 이미지가 관건이다. 그들은 점점 더 격식에 의존한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우월한 지배자인지 강조하고 확인했다. 어위광(御威光)이라고 불리는 이런 연극적인 이미지 창출 말고는 별다른 권력 정당화 작업에 신경 쓰지 않던 도쿠가와 정권은, 서양 제국주의라는 다른 강한 힘이 일본에 도래하자 정당화의 공백에 처하게 된다.
|
강동원.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
그런데 도쿠가와 정권이 사용한 이미지는 단지 무력의 표시였을까? 피지배층이 감복한 것은 무력 혹은 무력의 이미지라기보다, 그 이미지가 동반한 아름다움은 혹시 아니었을까? 때로 아름다움은 초월자의 존재나 논리적인 언술만큼이나 강력한 정당화 기제이다. 평소에 진정한 미인을 만나볼 기회가 없던 젊은이를 상상해보자. 그런 사람이 갑자기 대단한 미인을 마주치게 되면, 거의 정신줄을 놓게 되지 않을까? 아름다운 배우 강동원을 복도에서 마주치자,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는 체험담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울음까지는 터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미인이 하는 행동은 다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저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너무 가늘지도 굵지도 않으면서 영덕대게처럼 길게 뻗은 저 사지(四肢)의 스펙터클을 보라. 저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느닷없이 지나가는 행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흡혈을 해도 정당해 보일 거야. 느닷없이 내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어도 정당할 거 같아….
|
임금의 ‘거동’은 스펙터클에 담긴 권력의 동학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진은 조선시대 세종의 어가행렬 모습을 재현한 행사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
이 땅에도 이러한 심미적 스펙터클의 연원이 깊다. 실로 이 땅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미(美)의 장관을 구경하고 누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의 문인 윤기(尹愭, 1741~1826)의 ‘간완욕’(看玩欲)이라는 글을 보자. 그 글에서 윤기는 조선 사람들의 “보고 즐기려는 욕망”(看玩之欲)이 엄청난 수준에 달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모든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은 다 보고 즐길 대상이다. 그러나 그 욕망을 가장 활활 불타오르게 한 것은 바로 임금의 “거동”(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이었다. 그 아름다운 장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길에서 애를 낳는 사람이나 누각에서 실족해서 떨어지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至或有在途解娩者, 有從樓跌墜者)
임금의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배층의 권력 정당화 과정에 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19세기 말 고종 때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방문기에 따르면, 거동의 구경꾼들은 스펙터클에 담긴 권력의 동학을 몰랐던 것 같다. 비숍이 화려하고 극적인 과시라고 평한 임금의 “거동”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거동의 행로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정적 속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태도는 이 훌륭한 연중행사가 최대한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았다. 이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서울의 단조로움을 말해야 할 것 같다. (…) 이 모든 단조로움과 특색 없음에 대조되어 거동은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 적어도 비숍이 보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 연중행사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리고 거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거동 이외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데 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흑백티브이를 볼 때야 비로소 컬러티브이의 색상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이 단조로운 외관을 하고 있어야 비로소 거동의 스펙터클이 가진 화려함이 빛났던 것이다.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이야말로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간격이다. 지배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두드러지도록, 피지배층은 초라하고 단조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간, 그 피지배층은 지배층의 지배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감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아름다운 사람이 뱉는 침과 그가 때리는 따귀라면 감수할 용의가 있는 것처럼.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니, 부러우면 지배당하는 거다.
조선시대 ‘처벌의 스펙터클’
군주제를 벗어난 오늘날 한국에서도 조선 임금 거동의 위력은 계속된다. 임금의 거동이나 그 밖의 행렬의 화려한 모습은 조선왕조의 의궤(儀軌)에 남아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이른바 민족문화의 정화로서 종종 칭송된다. 프랑스군에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된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받기 위한 각계의 떠들썩한 노력과 언론의 보도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미인이 사용하는 고운 화장품과 화려한 의상이 비싼 것처럼, 모든 스펙터클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거동과 같은 전례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비숍의 추정에 따르면, “이 성대한 행사를 위해 왕국의 작은 재원에 2만5천 실링의 무거운 부담이 지워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의식해 급격히 군비를 증강했던 고종 시대에서조차도, 황실 전례에 관계된 비용은 군비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했다.
그런데 지배를 위한 스펙터클은 임금의 거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벌의 집행조차도 예전에는 스펙터클이었다. 이를테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를 시해하고자 한 죄인의 처형이 얼마나 거창한 스펙터클의 예식이었는지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예식은 “권력의 과도하면서도 규칙적인 과시를 만들어내는 일”이자, “호사스러운 세력 과시였으며, 권력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과장되면서도 동시에 규범화한 ‘소비행위’였다.” 푸코가 보기에, 유럽에 본격적인 근대가 도래하기 이전 권력이 자신을 행사하고 재확인하는 방식의 특징은 과잉과 과시로 가득 찬 ‘소비행위’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처벌의 스펙터클이 존재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시신이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인 천을 걸고 저잣거리에 효시되었을 때, 그것은 처벌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뿐 아니다. 다른 중죄인들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추국청(推鞫廳)에서 물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고문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나름의 스펙터클이기도 했다. 지방관청도 마찬가지다. 비숍은 부산 관청에서의 상황을 “포졸들은 거기서 야수적인 채찍질로 범인을 때려죽이며, 그 고통에 찬 울부짖음은 인접한 영국 선교소의 방까지 마구 파고든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채찍질은 바라보는 사람들을 전율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를 통해 보다 넓은 곳까지 스펙터클의 효과를 전한다.
|
<논어>에 나오는 예에 관련된 여러 구절은, 예의 의미가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몸짓까지 미시적으로 규율하게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한겨레> 자료사진
|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
윤기의 문학적 묘사에 따르면, 이런 조선 땅에서 임금의 거동을 보러 나온 어떤 만삭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이 임박했지만 화려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어이 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거리에서 해산을 하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아마 양반가의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고고(呱呱)의 성(聲)을 지를 아기의 관점에서 조선 사회를 바라보기로 하자. 마치 귄터 그라스가 <양철북>에서 난쟁이 오스카의 관점에서 혼란에 찬 독일 사회를 바라보았듯이.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은 <양철북>을 영화화하면서, 태어나기 직전의 오스카가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실제로 삽입한 적이 있다. 양수가 터진 엄마의 체모 너머로 보이는 너덜너덜한 당시 독일 사회. 이제 우리도 임금의 거동 구경꾼들 한가운데서 태어난 신생아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그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양철북>에서 오스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고 고성을 지르며 독일 사회의 모순을 고발했다면, 이 조선의 반영웅(anti-hero)은 계룡산의 요다에게 수련을 받은 뒤, 검은 갓을 턱 밑까지 푹 눌러쓴 다스베이더가 되어 조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다. 빈자(貧者)들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스펙터클에 골몰하고 있는 양반들을 광선검으로 베면서 조선의 다스베이더는 말하는 거다, “나는 너의 (아비가 아니라) 노비다.”(I am your nobi.)
쓰러지는 조선 양반들이 받들어 모셨던 공자 역시 지배의 스펙터클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공자가 깊은 관심을 둔 예라는 것은 그 기원을 적어도 상(商)나라 시대에 성행한 제사로 소급할 수 있다. 중국 고대에 이루어진 신에 대한 제사에 스펙터클의 요소가 강했다는 것은, 그 당시 쓰인 청동 제기들의 크기와 무게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상나라 때 청동 제기 중 무거운 것은 875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큰 규모의 청동기 생산은, 그만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정치권력이 집중화돼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크고 화려한 청동기들은 집중화된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됐다. 요컨대, 상나라의 예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신과의 교통을 자임한 스펙터클이었다. 그런데 <논어>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와 같은 구절은, 예가 더 이상 신에게 제사지내는 스펙터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논어>에 나오는 예에 관련된 여러 구절은, 예의 의미가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몸짓까지 미시적으로 규율하게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즉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행동거지로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에서, 예의 “규모”에 관한 한, 거시에서 미시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창의적인 공헌이라고 종종 주장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전환이 공자의 창의적인 발상이었을까?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