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날 제일 키가 큰 말이 눈에 들어왔다. 필요 이상으로 장대했지만,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그를 선택했다. 바람이라고 이름 지었다. 키르기스말로는 ‘간다’는 뜻이다. 공원국 제공
|
왼쪽 고삐 당겨도 반대방향 달리는
다섯살짜리 나의 말 ‘바람’
전 주인의 채찍으로 생긴 습관
초원 달리며 서로에 길든다
순수한 언어는 폭력의 정반대
주먹질 배제하고 원탁 앉으면
삼척동자나 군사령관이나 똑같아
‘제3의 관계’는 말로써 생기는 법
|
장날 제일 키가 큰 말이 눈에 들어왔다. 필요 이상으로 장대했지만,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그를 선택했다. 바람이라고 이름 지었다. 키르기스말로는 ‘간다’는 뜻이다. 공원국 제공
|
[토요판] 공원국의 유목일기
⑮바람과 시
5월17일 날씨는 좋았고, 마침 장날이라 습관처럼 가축 시장으로 나간다. 망아지 송아지를 실은 차들은 많은데 막상 거래는 뜸했다. 이런 날은 점심 전에 장이 파한다. 어슬렁거리며 시장 옆 공터로 가보니 동네 청년들이 말 한 마리를 번갈아 타며 웅성거렸다. 마침 말은 앞다리를 들고 서 있었는데 곁에 가기 약간 겁날 정도로 큰 놈이었다. 동물원에서 기린이나 코끼리를 볼 때처럼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나도 차례를 기다려 고삐를 넘겨받았다. 놀라서 공터를 겅중겅중 뛰는데 안장에서 전해오는 느낌이 완전히 새로웠다. 말을 선뵈는 카드르에게 물었다.
“몇 살이냐?”
“다섯 살. 세 달 전에 잘랄아바드에서 왔다.”
그래서 이렇게 크구나. 산소가 부족한 이 높은 곳에서는 저렇게 큰 덩치가 필요 없다. 장은 곧 파할 텐데, 그놈이 맘속으로 반쯤 들어와 쉽사리 놔줄 수가 없었다. 일단 마무르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이렇게 큰 놈은 나도 첨인데. 그런데 고도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나는 녀석을 친구로 이번 현지조사를 마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하영지를 돌아다니려면 말 없이는 안 되니, 필요 이상으로 큰 놈을 친구로 두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게다가 나나 녀석 모두 낮은 곳에서 온 타향살이들 아닌가. 그날 장터에서 나는 말을 산 기념으로 한턱냈고, 우연히 만난 졸드바이는 모직 안장깔개를 선뜻 선물했다. 74년생 동기들은 와서 이와 발굽을 봐줬다. 한결같이 말 자체는 걸물이라고 부러워했다.
바람난 수컷의 집요함
그러나 녀석을 들인 첫날부터 나는 말에 묶였다. 또 눈이 내려 6월이 되어야 하영지가 열린다. 그동안 녀석은 마구간에서 자야 한다. 똥오줌을 치우고 건초와 물을 먹이는 것은 그런대로 할 만하다. 하지만 달리기 위해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올리는 일은 물론, 너무 큰 놈이라 등자에 발을 걸기도 버겁다. 말은 물고 차는 동물이다. 나무 전봇대에 매어 놓으면 전봇대를 걸레처럼 물어뜯는 녀석의 이도 공포스럽지만 발길질에 맞으면 생사가 갈리는 순간을 맞을지도 모른다.
무조건 채찍으로 가르치는 빠른 방법이 있다. 하지만 서로 때리고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짐승이 어디 있겠나. 애교로도 물면 경고하고, 발길질을 할 때만 때린다. 그 나머지 행동은 천천히, 하지만 확고히 길들이기로 했다. 흔히 말하는 나쁜 습관은 한둘이 아니었다. 녀석은 덩치를 믿고 타르박 굴을 우회하지 않고 뛰어넘으려 한다. 타르박은 서식지에 벌집처럼 굴을 여럿 판다. 그러니 구멍 하나를 피하려다 다른 구멍에 빠지기 십상이다. 육중한 놈의 발굽이 빠지는 날에는 우리 둘은 목격자도 없는 초원에서 돌이키기 힘든 사태를 맞을지도 모른다. 도랑을 만나면 건너려고 오히려 속력을 더 낸다. 한 길 깊이 관개수로에 곤두박질칠 뻔했을 때는 놈을 사정없이 때리고 싶었다. 질주할 때 왼쪽으로 고삐를 당기면 거꾸로 오른쪽으로 튼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습관이었다. 마무르가 녀석의 사연을 들려줬다.
“잘랄아바드에서 주인이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채찍질을 했나 봐. 그래서 한 손으로 고삐를 잡으면 무조건 오른쪽으로 돌아 뛰는 걸 거야.”
고삐를 늘려서 두 손으로 잡았더니 정말 녀석은 똑바로 뛰었다. 녀석은 더 큰 비밀을 품고 있었다.
“세 달 전에 옆 마을로 왔는데, 암컷 때문에 그쪽 우두머리 수컷하고 심하게 싸웠대. 상처를 크게 냈나 봐.”
그래서 이놈은 이곳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유비가 타고 단계(檀溪)를 건넜다는 전설의 적로(的盧)를 물려받은 셈이다.
“사람들은 그냥 짐승이라고 하지만, 계속 타이르면 말을 알아들어. 멀리 있다가도 오라면 와.”
그래서 우리 두 타향살이는 서로를 알기 위해 매일 달린다. 사흘 만에 엉덩이가 쓸려 피가 났다. 저녁이면 슬쩍 딱지가 앉았다가 그다음 날 다시 타면 또 살이 터진다. 하루는 고삐를 바투 쥐고 직선으로 달리고 하루는 고삐를 늦춰서 녀석이 가고자 하는 곳을 대충 따라간다. 고삐를 늦추면 녀석은 항상 높은 언덕으로 올라 우두커니 자신이 떠나온 동쪽 방향을 바라본 뒤 길게 포효하며 암말을 부른다. 어쩌면 그렇게 귀신처럼 암말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지, 이 봄 바람난 수컷의 열정과 집요함을 말릴 재간이 없다. 그러나 저쪽 우두머리 수컷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둘이 만나면 물고 차고 야단이 날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져도 호소할 데도 없다. 사리모골 마을에서는 수말을 절대 거세하지 않으니 사방이 잠재적인 적들이다.
하지만 말은 크지만 솔직하고 아무리 봐도 착하고 예민한 짐승이다. 고집을 부릴 때는 화가 나지만, 그 시커먼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어떤 죄 많은 인간 하나가 들어 있다. ‘인간아, 너 자신을 봐.’ 속박이 싫어 가끔 물고 차지만, 놈은 원래 안장을 얹고 재갈을 물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춘정을 억누르고 부질없이 재갈을 씹기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원래 티끌만한 죄도 없이 태어난 놈. 나는 배운 게 그런 거라 녀석의 조상이 어쩌다 인간에게 구속되었는지 대충 안다. 처음 인간은 살찐 말을 잡아먹기 위해 말에 탔을 것이다. 얼마 후 목동들이 올라탔지만, 그중에는 가축 도둑들도 많았다. 그리고 한참 후 창 던지고 활 쏘는 정규 군인들이 올라탔다. 인간이 말 위에 올라탄 뒤 초원에는 항시적인 습격의 불안이 떠돌았고, 그 불안은 선제공격의 충동을 불러왔다. 지난 6천년 동안 인간과 함께하면서 이 겁 많은 동물은 평상시에는 옮기고 태우는 가장 생산성 높은 일을 담당하고, 투쟁의 시기에는 죽이고 부수는 가장 파괴적인 역할을 맡았다.
유목민은 모두가 시인
하지만 원래 길들이지 않은 말처럼 덩칫값 못 하는 겁쟁이는 없다. 말은 금속성을 경기하도록 겁내서 건초를 주는 쇠스랑을 봐도 놀라고, 쇠말뚝이 돌에 부딪힐 때는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밧줄이 벽을 스치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니, 처음 활시위 소리를 들으면 열에 아홉은 주인을 떨어뜨릴 것이다. 자연 상태의 말은 풀밭의 고요가 아닌 인공적인 것은 모조리 기피한다. 그런 녀석들이 전차를 끌고 사람을 태우고 화살을 무릅쓰고 시체를 뛰어넘으며 피 웅덩이 전쟁터를 누볐다. 전쟁터의 말은 대개 인간으로 인해 ‘미친’ 말들이었다.
내 말의 이름은 바람으로 지었다. 키르기스어로는 ‘간다’는 뜻이고 페르시아어로는 승리의 신을 뜻한다. 이 초원에서 한국어를 몇 마디 이해하는 유일한 녀석이다. 저처럼 나도 가족 없이 떨어진 몸, 넋두리를 들어주는 이도 녀석밖에 없다. 일주일 사이에 정들었다고 건초를 줄 때 옷을 슬쩍슬쩍 문다. 하지만 주는 시간을 10분만 어기면 킹킹대며 성화가 어찌나 심한지. 어쩌면 내가 녀석을 길들이는 것보다 녀석이 더 빨리 나를 길들일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안장을 얹을 때 발을 구르지만 감히 발길질은 하지 않는다. 우리 둘 사이에 뭔가 단순하지만 미묘한 제3의 언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기술의 진보로 다행히 말은 군역을 벗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인간과 기계의 관계로 대체되었지만, 과거와 다른 질적인 전복이 있는 듯하지는 않다. 기술은 출발 시 빠르고 강한 말을 대체하고자 했으므로 그 특성을 모방했다. 고대에 말이 그랬듯이 기술이 현대 사회의 생산력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꼭 같이 원거리 타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항시적인 불안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진선미(眞善美) 혹은 항상성을 따지지 않고 더 빠르고 강한 것으로 적을 때려 굴복시키는 관계의 속내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심지어, 수천만 마리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현대인은 선조들보다도 오히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 인색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실의 이 무지막지한 폭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 순수한 언어는 폭력의 정반대편에 있다. 주먹질을 배제하고 원탁에 둘러앉으면 삼척동자나 삼군의 사령관이나 다른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3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통해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언어가 폭력의 첩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폭력과 굴종의 관계를 뒤엎고 반폭력의 본령을 지키는 전복의 언어가 살아 있으니 그것이 시다. 시는 채찍과 당근 너머의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관계가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시적인 관계라고 바꿔 불러도 될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뮤즈 여신은 목동들 옆에 있다’고 할 때, 근세의 인류학자들이 ‘유라시아 유목민은 모두 시인이다’라고 할 때, 그들은 시와 인간과 짐승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전복이 끝나면 과거는 인습이 되므로 시인은 인습의 껍데기를 떠난다. 그러므로 마치 목동처럼 서슴없이 헌 집을 버리는 시인은 부동산이 없어 가난하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실제로 가장 가난한 직업인이라는 사실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시가 싹틀 수 없는 들판에 여전히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초원 사회도 예전부터 시와 폭력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오늘날 우리 사회가 시인들을 굶기듯이 지독스레 시와 반대의 길을 선택해왔을 뿐이다. 예컨대 지독한 날씨 때문에 초원이 황폐해지면 유목 사회 구성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다른 집단을 희생시켜 위기를 벗어나든가 내부에서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가끔 적자생존의 투쟁으로 돌입하거나 외부로 창끝을 돌리지만 대개는 공동체 안에서 시적인 도약을 택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오늘 우리 집의 가축을 다 잡아 공동체 전체와 나눈다. 한 사람이 거지가 되면서 공동체 전체가 잔치를 벌이는 셈이다. 그다음 날은 누구의 집, 그다음 날은 또 누구의 집 짐승들이 차례로 사라진다. 그렇게 공동체는 고기 부족 없이 겨울을 나고 한발을 견딘다. 남은 짐승은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풀을 먹고 살아남아, 다시 새끼를 낳고 초원을 채운다. 이것은 유별난 소규모 유목집단을 묘사한 말이 아니라 거대 킵차크한국의 관습을 묘사한 기록이다. 가축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시와 시인은 필요하면 사유의 경계를 넘어 죽음의 공포를 잔치로 바꾼다. 그렇게 공동체는 새로 태어나고 초원의 항상성은 유지된다.
초원에서 읊는 내멋대로 시
시인이 선물한 안장깔개를 깔았으니 나는 앞으로 영원히 이 말에서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졸드바이는 시인이다. 광산에서 일할 때나, 일이 시원치 않아 목동으로 돌아온 지금이나 그 웃음과 무조건 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올해 만날 때 거나하게 한잔할 기대에 부풀었더니, 안타깝게도 그 무지막지한 주당이 술을 딱 끊었단다. 막내 ‘꽃’(굴자다)도 어리고 언니 ‘달’(아이자다)도 어리니까 아빠 된 도리로서. 졸드바이다운 시적인 전복이다. 이제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아직 소 열두 마리가 있으니 아이들은 마음껏 아이란을 먹을 수 있다. 아주머니가 만든 아이란은 그저 시적인 맛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저녁 초대에 응했더니 졸드바이가 멋쩍게 웃는다.
“그래도 마유주는 괜찮다. 라마단 끝나면 마시자.”
나와 바람은 초원에서 매일 티격태격이다. 봄날이라 낮이면 늘 여우비 아니면 여우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종종 무지개가 뜬다. 주인은 평측 다 무시한 황당무계한 시를 읊고 바람난 말은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향해 달린다.
천손을 얻었으니 응당 하늘로 오르련만, 말은 어리고 주인은 어리석어 갈 길을 모른다네
저 설산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치고자 하나, 눈 깊고 얼음 두터워 디딜 곳이 없네
문득 보니 비 온 뒤 나온 쌍무지개, 하늘과 땅 사이에 커다란 다리 놓았네
먼지 말아 올리며 교각으로 달렸건만, 풀 바다 파란 하늘이 오색 용을 삼켜버렸네
得天之孫應上天 馬幼人愚不識路
?白山而欲躍空 雪深氷厚無踏處
忽見雨後雙虹出 乾坤之間?雄橋
捲土飛奔橋脚下 草海蒼天呑彩龍
|
바람(말)과 나는 매일 초원을 달리면서 서로를 길들이고 있다. 날씨 좋은 날 초원을 질주하고 마을에 돌아온 직후 바람을 타고 있는 필자. 공원국 제공
|
|
키르기스 초원에서 열린 5일장의 한 풍경. 끌려가지 않으려 애쓰는 양의 모습이 애처롭다. 공원국 제공
|
|
날씨 따뜻한 봄날 주흐라가 동생을 안고 바깥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공원국 제공
|
|
아직 여우눈이 날릴 때도 있지만, 키르기스 초원에도 봄은 어김없이 왔다. 푸릇푸릇 돋는 풀 사이로 자그마한 붓꽃 계통의 꽃 한송이가 피었다. 공원국 제공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