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25 19:57
수정 : 2018.04.25 20:09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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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인근의 맛집 ’호수집’ 사진제공 백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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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끝자락과 여름의 초입에는 늘 서울 을지로, 종로, 경리단길 일대를 좀비처럼 걸어 다니며 ‘바 호핑’(Bar Hopping)을 하곤 했다. 을지로 ‘만선 호프’에서 노가리에 맥주를 ‘때려 마시고’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걸어 다니다 ‘텍사스 호프’에서 기네스 한 잔, 자주 드나들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경리단길 ‘맥파이’에서 페일에일을 실컷 마시는 식이었다. 그나마도 젊은 시절의 치기였을까. 이젠 이 동네 저 동네를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지겹다.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진득이 마시는 것이 점점 편해진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닭볶음탕으로 유명한 서울역 인근의 ‘호수집’이었다. 그런데 예약도 안 되고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하는 콧대 높은 맛집인 것을 깜빡했다. 대기 손님으로 가득 찬 들머리에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만만한 치맥(치킨+맥주)이나 때리자” 중얼대고 향한 곳이 용산구 후암로에 위치한 ‘대우호프’다. 남산 자락의 밀레니엄 서울 힐튼 호텔에서 서울역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있다. 문을 연 지 어림잡아 40년도 넘었다.
들어가자마자 마치 매일 오는 단골처럼 “오백 두 잔에 프라이드 하나요!” 주문하고 강냉이를 연신 씹어댔다. 신선하고 맛있는 맥주에는 안주가 필요 없다지만 지글지글 기름 끓는 냄새에 연신 입맛이 돈다. 생맥주 두 잔을 연신 비운 찰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프라이드치킨이 등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잘 튀겨진 황금빛 튀김옷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 크지 않은 중간 크기의 닭을 세로 방향으로 절반 자른 투박한 모양새가 특별했다. 친구와 경쟁하듯 다리 살과 날개 살까지 뜯어 먹고 치킨 무도 씹었다. 튀김옷은 매콤하고 짭조름한 요즘 치킨과 달리, 얇았다. 살코기에 착 달라붙은 껍질은 고소한 기름기가 뿜어내는 풍미를 자랑했다. 살코기는 씹으면 씹을수록 장조림을 씹는 듯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닭 한 마리를 깨끗하게 해치우고 호프집의 영원한 귀염둥이, 골뱅이 소면을 주문했다. 시원하게 비빈 골뱅이 소면은 여름날의 ‘올 타임 레전드이자 신 스틸러’다.
애초 서울역 인근에 있었던 이 호프집은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서 남산 자락으로 다시 입성했다. 40년의 맛은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래 보이
는 동네 호프집에도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는 걸 알았다. 배가 남산만해질 때까지 마시고 언덕을 내려오는 길, 뜨거웠던 볕도 어느새 걷히고 내 마음의 불평불만도 맥주 거품처럼 사라졌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간사해서 “더워지기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은 쏙 들어가고 “왜 이렇게 덥냐”는 불평만 또 남았다.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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