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11 19:56
수정 : 2018.04.11 20:03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주머니 사정이 고만고만했던 대학생 시절에는 질 좋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고기는 굽고 싶고 잔고는 텅텅 비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가던 고깃집은 1인분에 2900원, 화강암보다 딱딱하고 고무줄처럼 질긴 냉동 삼겹살을 파는 곳이었다. 구석기 시대에 뛰어놀던 돼지를 얼린 것처럼 강한 불에서도 좀체 익지 않았고, 묘한 노린내까지 났다. 애꿎은 냉동 삼겹살을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오랜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 무엇을 먹고 마실지 2박3일을 토론하다 낙찰된 메뉴가 예의 그 냉동 삼겹살이다. “돈 버는 사회인이 꼭 냉동 삼겹살을 먹어야 하나”라는 나의 투덜거림은 무시당한 채로 ‘지하철 봉천역으로 오라’는 말만 단체 카톡방에 황망하게 남았다. ‘서울 3대 상권’ 중 하나로 꼽히는 봉천역 일대는 주머니 사정 가벼운 대학생과 인근 직장인으로 늘 붐빈다. 싸고 맛있는 진짜 맛집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하철 봉천역과 서울대입구역 사이에는 냉동 삼겹살만 파는 전통의 강호, ‘부림’이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얇고 단출한 냉동 삼겹살이 상 위로 올랐다. 포일을 깔아 놓은 불판 위, 테트리스를 하듯 네모반듯한 삼겹살을 차곡차곡 올렸다. 자주 뒤집지 않아도 되고 자르지 않아도 되는데다 소주 한 잔 마시고 바로 집어먹을 수 있게 빠른 속도로 익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용암처럼 끓어 넘치는 청국장과 계란찜이 ‘서비스’로 등장하는 지점에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청국장 한입, 파무침을 넣고 돌돌 만 삼겹살 한 쌈, 소주 한 잔을 마시니 그간 내가 미워했던 것은 냉동 삼겹살이 아니라 싸구려 고깃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명이 함께 삼겹살 6인분, 소주 6병을 시원하게 해결하고 해장을 핑계로 이 집의 숨은 메뉴인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시원하고 쿰쿰한 묵은지를 넣고 푹 끓인 김치찌개는 시고 맵고 칼칼하고 달큼한 맛이 꼭 얌꿍을 닮았다. 김치찌개 한 숟가락에 또다시 소주를 마시다 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흐른다.
보광동 ‘잠수교집’, 역삼동 ‘랭돈’, 합정동의 ‘행진’까지 최근 ‘핫’하다고 입소문 난 고깃집이 모두 냉동 삼겹살 전문점인 것이 이제 보니 놀랍지 않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너무 익숙해서 시들했던, 촌스럽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쓴 냉동 삼겹살도 다시 보인다. 오늘도 미세먼지가 바람에 스친다. 냉동 삼겹살을 먹어야만 하는 계절이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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