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08 09:29
수정 : 2018.03.0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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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피티 서울’. 백문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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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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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피티 서울’. 백문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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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길고 긴 겨울도 끝나가는 모양이다. 대낮의 빛이 제법 따갑다고 느껴질 때, 따뜻한 햇볕에 홀려 얇은 홑겹 외투만 입고 나갔다가 어둑해질 무렵에 후회하기를 여러 번이다. 낮에는 봄, 저녁에는 초겨울 같은 날씨가 연일 계속되면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래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연골까지 얼려 버릴 듯한 냉혹한 온도가 가신 자리에 선선하고 온화한 훈풍이 들어서는 차다.
슬슬 들려오는 봄노래에 그간 얼었던 마음도 말랑해져 육신을 이끌고 바깥 외출을 슬슬 시도했다. 걷기 좋은 동네를 찾아 헤매다 생각난 동네는 용산구 보광동이다. 늘 시끌벅적하고 언제나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해밀턴호텔에서 길을 건너면 마주하는 한적한 골목은 낯설면서도 여유롭다.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를 판매하는 가구 상점들이 즐비한 ‘이태원 가구 거리’의 길 끝, 빨간색 네온사인이 독특한 ‘에이피티(Apt) 서울’이 보인다.
봄기운에 취해 사연 있는 사람처럼 노을 속을 한들한들 걷다 마주치는 ‘에이피티 서울’은 겉에서 보면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독특한 분위기에 이끌리듯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응당 있어야 할 문이 보이지 않는다. ‘Apt’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왼편에 두고 코너를 돌아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이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드러난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바(bar) 테이블 탓에 ‘칵테일 바인가’라는 생각도 잠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이 보인다. 넓은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햇살, 공간을 채우는 듯한 부드러운 재즈 음악까지 봄의 노을을 즐기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고개를 들어 바 테이블 쪽을 살펴봤다. 각종 위스키와 스피릿, 와인까지 다양한 주류를 갖춰 놓은 ‘백 바’(back bar)가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카페로, 해 저물 무렵부터는 칵테일 바로 운영한다”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은 차가운 봄 공기를 코로 느끼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고 주위를 살폈다 가져온 책을 펼쳤다. 따뜻한 볕을 받으며 소설책을 꺼내 들고 나니 ‘신선놀음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으쓱해진다.
부쩍 길어진 해가 슬슬 저물고 어스름이 찾아올 무렵, 어김없이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해가 졌으니 이제 술을 주문해도 되냐”는 질문을 하며 껄껄 웃고 달콤한 버번위스키 한 잔과 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필요한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데 부귀영화가 다 뭐고, 입신양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날씨처럼 감정이 널을 뛸 때가 있다. 봄을 타는 건지, 팍팍한 현실이 못내 아쉬워서인지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새삼스러운 내 감정이 부담스러운 날에는 낯선 곳에서 보내는 생소한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낮은 낮대로, 아직은 찬 바람이 슬슬 부는 스산한 밤은 밤대로 의미가 있다. 인생이 늘 달콤할 수는 없는 것처럼 늘 따뜻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늘도 달콤하고도 쓴 버번위스키로 속을 데운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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