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7 19:32
수정 : 2018.01.17 19:42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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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의 칵테일. 백문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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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동네에 단골로 삼을 만한 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가깝게 지낸 사람이 멀리 떠나갔을 때가 특히 그렇다. 그를 생각하면서 한잔을 기울이기에 그런 바만한 곳이 없다. 물론 여럿이 가서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그저 고요히 혼자고 싶다.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분위기, 적절하고 정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바텐더까지. ‘단골 바’를 찾는 이유는 이런 미덕에서다.
날씨가 좋을 때는 걸어서, 궂을 때는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넌다. 한남 오거리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각종 술집과 식당으로 번화한 먹자골목이 나타난다. 취객 사이를 뚫고 우측으로 돌아 천천히 주위를 살피면 묵직한 나무문이 보인다. ‘광부’를 뜻하는 ‘마이너스’(miners)의 간판이자, 이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은은한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로 향신료의 일종) 향이 퍼지는 실내는 지하 탄광을 연상시키는 듯 어두컴컴하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조도다.
들머리에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맞아주는 바텐더에게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술을 가져왔다”고 자랑하며 술을 꺼냈다. 가져간 술을 한잔씩 마시고 웃고 떠들다 보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정겹다. 단골 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다.
슬슬 취기도 오르고 몸은 점점 술을 원하니, 드디어 칵테일을 주문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늘은 좀 ‘빡센’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는 추상적이고 다소 생뚱맞은 부탁을 하고 기다렸다. 버번위스키가 베이스인 ‘올드패션드’가 테이블에 오른다. 버번의 달콤한 향, 쌉싸래한 비터의 맛, 은은한 계피 향까지 완벽하게 간이 딱 맞는 한잔이었다. 올드패션드를 첫 잔으로, 새콤달콤한 ‘김렛’으로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토마토주스, 타바스코소스, 후추를 듬뿍 넣은 ‘블러디 메리’로 해장하면 한껏 올랐던 취기가 달아난다.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 버렸다는 허망한 심경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잘못했다는 자책감에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주는 친숙함이 절실하다. 지하를 밝히는 광부의 칵테일로 어두운 마음을 다독거린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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