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0 19:35
수정 : 2018.01.11 14:22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
부다페이스의 맥주. 백문영 제공
|
퇴사하고 나니, 나 자신을 돌아보고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먹고 마시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만큼 그동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새로운 동네에 대한 탐방 욕구가 솟구쳤다. ‘오늘은 또 뭘 마실까’ 스마트폰으로 맛집 블로그를 뒤적이며 뒹굴뒹굴해도 매번 식상한 동네, 뻔한 맛집뿐이라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가 멀다 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뜬 목소리로 “핫 플레이스를 찾아냈다”며 함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하나’ 싶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오늘도 한 건 잡았구나’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나간다”라고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인사이동, 이직, 상사 욕이 난무하는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 묘한 우월감을 느끼며 지하철에 올랐다. ‘위치를 정확히 찍으라’는 내 요청에 친구는 ‘지하철 구의역 1번 출구’라는 짧은 답만을 카톡에 남겼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서나 흔히 만날 법한, 그렇고 그런 ‘구의동 먹자골목’만 보였다. 속았다는 기분에 황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친구의 뒤를 따랐다. 삼겹살집, 횟집, 곱창구이 전문점 등 별다를 것 없는 먹자골목 풍경이 못내 불안할 때쯤, 붉은 네온사인이 화려한 ‘부다페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나만 믿으랬지, 내가 뭐랬느냐!”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친구의 어깨가 그날따라 든든해 보였다.
담담한 나무테이블과 정갈한 의자. 잎이 큰 녹색식물로 가득 채운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 구성 때문에 ‘술집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층은 커피와 차를 판매하는 카페로 운영된다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펍이 펼쳐진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은은히 밝히는 조명, 10여가지의 화려한 크래프트 맥주 탭, 동양화가 그려진 화려한 병풍과 앤티크 의자까지, 1층과는 상반된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곳의 대표 메뉴로 추천받은 ‘광어 앤 칩스’, ‘모둠 소시지’를 주문했다. 더 핸드 앤드 몰트, 브루어리 304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맥주와 와인, 위스키까지 모두 한자리에서 마실 수 있는 은혜로운 공간이다.
화려한 풍미의 홉과 코코아 향이 산뜻하게 어우러진 ‘아이피에이(IPA) 블랙’을 골랐다. 맥주잔을 받치는 컵받침, 꽃 그림이 새겨진 전용 잔, 세련된 로고까지 눈을 즐겁게 하는 디자인적 요소가 가득해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볼 틈조차 없었다. 레몬을 듬뿍 뿌린 튀긴 광어를 크게 한입 먹고 맥주를 들이켰다. 산적처럼 소시지를 뜯어먹고 남은 맥주를 마셨다. “맥주로 빈속을 달랬으니 와인 마시자, 섞어 마시는 것이 몸에 좋대” 술기운에 우스갯소리를 하며 호주 시라즈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음악, 채워지는 술잔, 비어가는 접시, 마음 맞는 친구와의 수다. 그날 나는 부처님도 부럽지 않았다. 염화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밤이었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