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27 20:05
수정 : 2017.12.27 20:12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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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 리커’. 백문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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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까짓것 조금 쉬면 되지’ 짐짓 큰소리를 쳤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둘 길이 없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 된다’라는 말은 사치다. 적게 벌면 쓸 수가 없고, 안 벌면 거지꼴을 면치 못한다. 계산서 앞에서 위축되는 소심한 마음이 부끄럽다.
몸도 마음도 추울 때, ‘술 사주겠다’는 이야말로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비싸고 좋은 곳에 가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간 곳은 한남동 ‘한남 리커’다. 와인 숍과 바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친구의 성화에 이끌려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빈티지 조명, 반짝거리는 대리석 탁자, 크리스털 디캔터(술의 침전물을 거르기 위한 도구)까지 공간을 가득 메운 호사스러운 소품을 모아둔 세련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전세계의 와인을 모두 모아 놓은 듯 방대한 와인 리스트를 읽는 둥 마는 둥, 이곳을 책임지는 김민주 소믈리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탈리아 대표 포도 품종 산지오베제(산조베세)로 만들어 부드러운 풍미를 자랑한다’는 ‘지오그라피코 로쏘 디 몬탈치노’를 골랐다. 한남 리커의 대표 안주 ‘한남 플래터’도 곁들였다. 치즈, 오리 리예트(고기나 생선을 잘게 자르거나 으깬 요리), 하몽과 과일, 견과류까지,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메뉴를 한꺼번에 모은 풍성한 접시다. 글라스계의 황태자라 불리는 잘토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아찔하다. 살짝 움켜쥐기만 해도 깨질 듯 얇은 글라스를 휘휘 돌렸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우아하고 달콤한 향 때문인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우아한 분위기 때문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돈 많이 벌어서 이런 곳에 매일 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친구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입안으로 와인을 흘려 넣었다. 당장 눈앞의 일을 조급해한다고 미래가 오는 것은 아니다. 차분히 주변 정리를 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보리라 다짐한다. 일단 오늘까지만 마시고, 불안감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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