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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06:02 수정 : 2019.08.09 20:36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정혜경 지음/섬앤섬·2만원

식민지 시기 재일조선인의 삶과 민족운동을 연구해온 정혜경 박사는 어느 날 깜짝 놀랐다. 2004년 발족한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지원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판정한 21만8639건 가운데 가장 어린 사망자가 아홉살 소녀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진주만 침공으로 전쟁 무대를 넓힌 일제는 비행장 건설 등 토건과 석탄채굴·군수업 등에 많은 조선인을 징발했는데, 가장 동원 연령이 낮았을 때인 1944년에도 법적인 기준은 12살 이상이었다. 조선인 아홉살 소녀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철저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 셈이다.

지원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각종 기록과 생존자들의 사연을 접할수록 기가 막혔다. 언니 대신 일본 도쿠야마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간 열두살 길만, 두 번 징용갈 순 없다며 숨어버린 형님을 대신해 홋카이도 미쓰비시 광산에 간 열네살 태순, 만주로 징용 가야 하는 아버지를 위해 열살 어린 나이에 영등포 가네보 방적 공장에 간 옥순, 심부름 갔다가 역앞에서 납치돼 사할린 탄광에서 일한 열다섯살 소년 용암, ‘사시사철 따뜻한 낙원’이라는 꼬임에 빠져 남태평양 티니안으로 간 가족들을 위해 여섯살부터 카사바 농장에서 일한 금복 등등…. 환경은 처참했다. 끼니는 보리쌀 몇알 뭉친 콩깻묵이 전부였고, 광산에선 폭발사고가 비일비재했으며, 화학 공장의 유독가스에 무방비로 노출됐고 수시로 매질이 쏟아졌다. 신체적으로 숙성한 소녀들은 현장감독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가까스로 살아남아 한국에 왔지만 비극은 계속됐다. 한국전쟁 때 국군에 징집돼 상이군인이 된 기구한 인생도 있고,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행실이 좋지 않다는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많았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한국인 징병·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주장하면서, 강제동원으로 인생을 망친 한국인들의 개별적인 삶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반드시 소상히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한 생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힘든 일 당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해. 그래야 겪은 이야기를 세상에 해줄 수 있지. 오래 살지 못하면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은 없었던 일처럼 되는 거여. 그려, 다들 모르니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거여.”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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