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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05:59 수정 : 2019.08.09 20:35

일본의 태평양 전쟁 다룬 논픽션
군부 ‘하극상’ 전쟁 예견했다고 봐
“반복되는 건 역사가 아니라 본성”

일본 제국 패망사
존 톨런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글항아리·5만8000원

1941년 7월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 내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시켰다. 미국은 일본의 주 석유 수입원이었기에, 이는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전쟁을 제외한 가장 심각한 타격”이었다. 이에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히로히토 일왕을 알현해 “어떤 상황에서든 선수를 치는 것이 낫다”며 미국 공격을 제안한다. 히로히토는 물었다. “제독의 말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거요?” 나가노는 답한다. “송구합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석유 비축량이 2년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18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전쟁은 절망적이겠군.” 일왕의 대답이었다.

전망이 이렇게 비관적임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크기에 불과한 일본은 왜 열 배는 더 강한 적에게 자살행위와 같은 공격을 했을까? 대미 개전을 놓고 벌인 1년간의 지루한 논쟁 끝에 어떻게 전쟁파가 외교파를 이겼을까?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은 정녕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1945년 9월2일 미군 미주리호 함상에서 이뤄진 항복문서 조인식에 나온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와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가 일본 대표단 맨 앞에 서 있다. 사진 미 육군. 글항아리 제공
이런 질문을 품고 써내려간 <일본 제국 패망사>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감행하고 일련의 육해공 전투를 치른 뒤 원폭 투하로 항복 선언을 하고,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왕이 만나는 장면으로 끝맺을 때까지 쉼없이 내달린다. 인상적인 대목은 진주만 공습 13년 전에 발생한 하극상 사건에서부터 이미 전쟁이 예견됐다고 보는 점이다.

1928년 만주에 파견된 일본 관동군의 두 장교는 만주가 일본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인구는 매년 100만명씩 증가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이들을 흡수할 여력이 없었다.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시위를 벌였고, 직장에서 쫓겨난 수십만명의 도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하지만 정부와 관료들은 부패 스캔들을 일으키며 제 호주머니만 불렸다. 군부대들이 훈련을 받다가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경시청을 향해 일제히 소변을 내갈길 정도로 정부에 대한 경멸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중국으로의 세력 확장을 반대하는 젊은 일본군 장교들이 1936년 도쿄를 장악했다. 이들의 봉기가 실패로 끝나면서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 마이니치신문. 글항아리 제공
두 장교는 광활한 황무지 만주를 산업화하고 일본화함으로써 조국의 인구 과잉 및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소련을 막아내는 완충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일왕과 육군성이 이 계획을 거부하자 무단 행동에 나섰다. 먼저 중국 군벌 장쭤린을 암살하고 선양 지역을 수중에 넣는다. 깜짝 놀란 도쿄가 중단을 명령했지만 관동군은 만주의 나머지 지역을 휩쓸었다. 결국 밀고자들에 의해 하극상은 중단되었지만, 일본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이들의 처벌은 ‘징역 20일’에 그쳤다. 이후 군부 내 이런 반란이 잇따랐고 결국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 나아가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졌다.

1972년 퓰리처상을 받은 <일본 제국 패망사>는 전쟁사학자인 존 톨런드가 15개월간 일본,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반도 등을 돌며 500여명의 관련자를 인터뷰한 결과를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만든 책이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는 일왕의 수석 고문인 궁내대신, 최고 군 지도자들, 수백명의 말단 병사들과 민간인들, 트루먼 대통령과 수십명의 미국인 전쟁 포로들도 포함돼 있다. 미국의 정보공개법으로 입수한 방대한 자료도 바탕으로 해, 코델 헐 국무장관 등 전쟁 당시 미 정부 이너서클의 생생한 육성도 들을 수 있다.

무방비 상태의 도쿄. 미군 B-29 폭격기가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상태로 국회의사당 위를 날고 있다. 사진 교도통신사. 글항아리 제공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서만 다뤄졌고 그 자체에 대한 통사가 드문 까닭에 이 책은 서구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우리 입장에선 걸러서 읽어야 할 대목도 종종 있다. 다행히 옮긴이는 각주를 통해 저자가 왜 이렇게 썼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설명해준다.

지은이의 말대로 이 책은 “역사상 전례 없이 강력한 전쟁의 홍수에 휘말린 사람들의 모순과 역설에 가득 찬 대하역사극”이다. 그의 결론은 “역사에서 단순한 교훈은 없으며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톨런드가 보기에 일본인은 총체적 모순덩어리다. “예의가 바르면서 야만적이고, 정직하면서 믿을 수 없으며, 용감하면서 비겁했다. (…) 동양을 위해 동양을 구하겠다며 동양으로 쳐들어가 결국은 동양인에 대한 살육으로 끝났다.” 정말로 일본인의 본성은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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