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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05:59 수정 : 2019.08.09 20:24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집
일본 우경화 고찰하며 ‘본성’ 짚어
“전후 민주주의·평화주의는 겉치레”
“과거사 책임 판단 회피가 근본 문제”

책임에 대하여-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돌베개·1만8000원

2018년 10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확정판결을 내리고, 그에 따른 법적 절차가 진행되자 일본 정부는 보복 조치로 경제·무역 규제를 시작했다. 한일관계는 악화할 대로 악화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고찰하는 <책임에 대하여>는 한국인들이 일본을 “제대로” “더 깊이” 알았으면 한다며, 일본의 ‘본성’을 짚고 있다. 책은 서경식(68)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63)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가 2016년과 2017년 세 차례 나눈 대담을 엮었다.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 왜곡을 비판해온 대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천황제 등을 살펴보며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식민주의적 심성”을 파고든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0월14일 도쿄 인근 아사카의 육상자위대 훈련장에서 육상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아사카/AP 연합뉴스
대담자들의 기본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낱말은 ‘도금’(鍍金)과 ‘지금’(地金)이다. 금속 표면에 다른 금속의 얇은 층을 입히는 ‘도금’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밈을 뜻한다. ‘지금’은 도금을 벗겨내면 나오는 금속을 뜻하는데 책은 이를 ‘본성’으로 풀고 있다. “‘본성’이란 메이지부터 패전까지의 기간에 만들어진 일본 국가의 체질,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그것을 내면화한 일본의 국민 의식이기도 합니다. ‘식민주의’는 그 핵심적인 요소입니다.”(다카하시) 두 사람은 1945년 이후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일본의 본성을 가린 ‘도금’에 불과했고, ‘식민주의’라는 일본의 ‘지금’(본성)이 1990년대 후반 이후 우경화와 왜곡된 역사 인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60여년이 지났지만 ‘본성’은 변함없이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

다카하시 데쓰야.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피해국 사람들의 소리에 대해, 1990년대 후반의 일본 사회에서는 역사 수정주의라고 해야 할 ‘반동’이 보수 세력과 미디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다카하시) 이후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불거져 ‘북한 때리기’가 진행됐다. 보수 세력의 역사 수정주의 캠페인과 납치사건을 빌미로 전쟁·식민지배 책임을 회피한 “응답의 실패”가 우경화의 요인이었다.

대담에서는 이른바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을 넘어서자는 일본 ‘리버럴’에 대한 비판이 주요하게 다뤄진다. 리버럴들이 ‘보편주의’를 거론하며 역사성을 망각하거나 가볍게 여긴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1999년 일장기 ‘히노마루’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정한 ‘국기·국가법’을 제정했다.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독일·이탈리아 가운데 전쟁 때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저항 움직임도 있다. “그 주된 논리는 학생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강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그 자체는 옳습니다만 히노마루, 기미가요가 짊어진 역사를 전면에 내세운 저항은 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사상·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주의에 빠져 있는데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있지요. 학생들한테 가르칠 때 ‘여러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떤 역사를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서경식)

서경식.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yongil@hani.co.kr
1990년 1월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이 히로히토 천황한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가 우익 세력의 총격을 받았다. 언론들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모토시마의 주장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실로 ‘공허한 주체’지요. ‘언론의 자유를 지켜라’라고 하면서 어떤 언론인지는 말하지 않고 회피했습니다.”(서경식) 일본의 국제미술제인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을 두고 ‘표현의 부자유’만 비판하고 소녀상의 역사성,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닫는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전쟁 책임’ ‘전후 책임’ ‘식민지배 책임’ 중 어느 것이든 1945년에 끝난 일본 제국 체제에 대한 책임을 불문에 부쳐 왔다는 점, ‘중심부 일본 국민’이 그에 대한 판단을 회피해 왔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과거 역사의 잘못을 직시하며 그것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점이 전후 일본의 근본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지요.”(다카하시)

대담자들은 일제가 저지른 전쟁 범죄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과 책임 회피가 패전 이후 미군 기지가 들어선 오키나와 문제로 이어진다고 본다. “일본 국민 다수는 예전에는 소련, 지금은 중국, 북조선,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자신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군사적으로 미국의 비호 아래 있고 싶다는 바람을 지녔고, 그것이 식민주의, 차별의식과 결합하면서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집중시키는 정책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습니다.”(서경식) 과거 식민지배와 차별의 구조가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도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0월14일 도쿄 인근 아사카의 육상자위대 훈련장에서 육상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아사카/EPA 연합뉴스
일본이 취해온 ‘보편주의’의 이중성, 양면성을 지적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중국이나 북조선을 비판할 때는 자신들이 구미 쪽의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그룹의 일원임을 늘 강조합니다.”(다카하시) 그러나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자민당의 논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국민주권, 기본적 인권, 평화주의. (…) 여러분, 이 세 가지는 맥아더가 일본에 강요한 전후 레짐 그 자체 아닙니까. 이 세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진정한 자주 헌법이 될 수 없어요.”(1차 아베 신조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낸 나가세 진엔이 2012년 5월10일 ‘창생 일본’ 연수회에서 한 발언)

일본 우익은 “국민 통합의 상징인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제국 헌법으로 돌아가려 한다. 대담자들은 이를 ‘일본적 보편주의’라고 부르며, 반민주주의적인 사상이 일본의 정치 속에 뿌리가 깊은 것도 천황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전쟁 가능한 나라’를 만들려는 일본 우익들은 동아시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평화를 지향하는 시민들의 연대를 넓히는 것이 이를 헤쳐나가는 길이라고 대담자들은 말한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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