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6 17:28
수정 : 2019.08.06 19:06
‘귀태’라는 두 글자가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7월 당시 야당인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고위정책회의 브리핑에 포함된 단어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의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다.” 이에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이 강력히 반발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국정조사를 비롯한 국회 일정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자 홍 의원은 이튿날 대변인직에서 물러났다. 귀태라는 낯선 단어가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계기였다. 귀태는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의 조어라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탄핵을 당해 나락에 떨어져 있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는 여전히 일본 정계의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다.
귀태의 후손으로 지목됐던 아베 총리가 이번엔 한국의 정상으로부터 ‘민폐’ 딱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목록에서 빼기로 결정한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긴급 국무회의에서 “우리 경제를 공격하고 우리 경제의 미래성장을 가로막아 타격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졌다”며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뜨려 세계 경제에 큰 피해를 끼치는 이기적인 ‘민폐’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평소 문 대통령의 언어 습관에 비춰 ‘민폐’라는 표현은 대단히 자극적이고 도드라지게 들렸다.
문 대통령의 비판처럼 아베 정부의 조처는 한국은 물론 일본, 나아가 세계 경제 모두에 해악 요인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금융시장과 관련 업체들 주가에 이미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민폐’ 아베 총리가 정치철학이나 역사인식의 본보기로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꼽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기시 전 총리는 일본 통산성 관료로 괴뢰 만주국(1932~1945년)을 이끈 주역이었고, 종전 뒤엔 에이(A)급 전범으로 지목받아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극우 인물이다.
이와 달리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나 친할아버지 아베 간은 평화주의자의 길을 걸었고 평화헌법을 옹호하는 상반된 삶을 살았다. 아베 총리를 정계에 입문시킨 이도 1982년 외무상에 발탁된 아버지 아베 신타로였다고 한다.
아베 총리가 평화주의였던 친가 대신 군국주의 외가의 정치 유전자를 물려받고 있는 현실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불행이다. ‘일제 식민지가 한국에 피해를 준 게 아니라 도움을 줬다’는 극우 세력의 낡은 역사 인식으로 어떻게 동아시아의 미래를 이끌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는가.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