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5월29일 오전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2016 국제로터리세계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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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70)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한때 선방 수자들과 자주 어울렸던 적이 있다. 동해안 별신굿을 찾아 새벽 기차를 타기도 했고 지리산에 장승을 세우기도 했다. 연극판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곡차를 주고받으며 분하고 답답한 정치를 토하기도 했고 우주의 운항법칙을 캔다며 날밤을 새우기도 했다. 잘 놀았던 시절이다. 어떤 이들은 왜 그런 ‘돌중’들과 몰려다니느냐고 타박했지만 나는 마냥 좋았다. 부랑아와 돌중은 통하는 구석이 많았으니까.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여태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는 이도 있고, 이름깨나 날리는 사판승이 된 이도 있고,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이도 있다. 비록 오랫동안 못 만났지만 도시에서 짧은 일탈을 접고 동안거에 들던 그이들 모습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다. 스산한 늦가을 낙엽을 밟으며 산문으로 향하는 그이들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모질게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거기엔 아쉬움을 끄는 작별도, 내년 봄을 기다리는 언약도 없었다. 걸망 하나 달랑 메고 산속으로 사라지던 그 수자들 뒷모습이 내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박혀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그 뒷모습은 ‘떠나야 할 때’를 가르쳐준 진정한 스승이었다.
대선 출마 시사한 반기문 총장외신들, 국내 일정 비판 일색
지금도 전쟁 난민만 6천만명
총장 재임 기간 2천만명 늘어 엄청난 연봉에 최고급 대우
명예직도 봉사직도 아닌 자리
분쟁 조정하라는 국제사회의 위임
‘월급만큼 일하라’는 뜻 아닌가 분란 자초하며 되레 “도와달라” 지난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뿌려댄 뉴스를 보면서 그 수자들 뒷모습이 떠올랐다. 5월25일부터 30일 사이, 6일 동안 한국을 휘젓고 다닌 반기문은 나라 안팎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국제 언론이 뽑아든 제목들을 보자. “유엔 총장 한국 도착, 대통령 출마 추측 무성” <아시아 타임스> 5월25일, “유엔 총장 반기문 한국 대통령 출마 가능성 시사” <스트레이츠 타임스> 5월26일, “유엔 총장, 한국 유력 대선 후보로 풍파 일으키다” <니혼게이자이신문> 5월27일, “유엔 총장, 한국 대통령 출마 추측에 기름 끼얹다” <스푸트니크> 5월30일, “유엔 총장, 한국 대통령 출마 추측 차단했다” <방콕 포스트> 5월30일, “유엔 총장 반기문, 한국 대통령 노리나?” <텔레그래프> 5월30일…. 저마다 에둘렀지만 한마디로 현직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흘리는 게 눈꼴사납다는 뜻이다. ‘반기문 동아리’가 외신을 번역할 때 속살을 잘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7개월 남은 임기를 잘 끝낼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반기문은 뉴욕에서도 한국에서도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참 염치없는 말이다. 스스로 분란을 몰고 다니면서 뭘 도와달라는 건지. 나라 안팎 언론을 뒤져보라. 세계 시민사회는 상식과 원칙을 지닌 유엔 사무총장을 바라고 있다. 반기문의 지난 6일을 따져보자. 5월25일 한국에 갔다가 26~27일 일본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 30일까지 머물렀다. 27일 일본에서 뉴욕으로 곧장 되돌아가는 게 상식과 원칙이었다. 임기 7개월을 남겨둔 유엔 사무총장이라면, 누가 봐도 정신없이 바빠야 정상이다. 겉으로 드러난 반기문의 한국 방문 이유란 게 제1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유엔 엔지오(NGO) 콘퍼런스, 국제로터리세계대회 참석이다. 모두 축사 한마디로 끝낼 행사들이다. 그런 건 요즘 영상으로도 얼마든지 때울 수 있다. 그 나머지 한국 일정들은 모조리 정치인을 만나는 데 할애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그렇게 여유로운 게 아니다. 물난리가 났을 때 동장 박씨가 자리만 비워도 난리 나는 세상이다.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지금은 제3차 세계대전 중이다. 오늘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예멘에서는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다. 크고 작은 지역 분쟁만도 100여개에 이른다. 그사이 50만명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반기문이 하회마을을 돌아다니던 시간에도 숱한 아이들이 죽었다. 지금 전쟁 난민만도 6천만을 웃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 12명 가운데 1명이 난민이라는 뜻이다. 그 가운데 51%가 아이들이다. 반기문이 사무총장을 맡은 지난 10년 동안에만도 난민이 2천만명 늘어났다. 어림잡아 하루에 5만명이 전쟁과 박해를 피해 난민 신세가 되고 있는 판이다. 그런 전쟁과 분쟁을 조정하고 난민을 돌보라고 국제사회가 권리와 의무를 맡긴 사람이 바로 유엔 사무총장이다. 가는 곳마다 국가 원수급 대접을 해주는 것도 폼을 잡으라는 게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하라는 뜻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명예직이거나 봉사직이 아니다. 세계 시민사회가 짜낸 세금으로 멋들어진 집에다 활동비와 보험, 월급까지 줘가며 고용한 5년짜리 공직자다. 그것도 대한민국 대통령 연봉보다 많은 22만7천달러(약 2억7천만원)나 준다. 지구 총인구 71억 가운데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빈자만도 24억이다. 유엔 사무총장 연봉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온 세상이 굶주리는 마당에 그런 귀한 돈을 받는 게 유엔 사무총장이다. 바로 그 빈곤 문제도 유엔이 풀어가야 할 가장 중대한 사안이다. 월급 받은 만큼 일하라는 뜻이다. “정치적 행보가 아니다… 지나친 확대 해석, 과장은 말아 달라.” 6일 동안 대통령 출마 낌새를 흘리며 나라 안팎을 들쑤셔 놓았던 반기문이 남긴 말이다. 평생 외교관을 한 사람치고는 아주 안 어울리는 태도다. 책잡히지 않는 말과 몸가짐은 외교판 기본문화다. 전직 총리에다 장관들을 줄줄이 만났고, 충청권 대부라는 김종필을 만났고, 느닷없이 하회마을을 찾아 경상도 정치 패거리를 만났던 게 반기문 일정이다. 정치인들을 그렇게 바삐 만나고 다니는 걸 정치 행보라고 한다. 지나친 확대 해석이나 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기문의 6일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반기문은 정직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다. 한국 언론이나 외교판에서 불러온 별명인 “기름장어”, 딱 그 짝이었다. “내부 분열된 모습… 누군가 대통합을 선언하고 솔선수범하고… 국가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반기문이 제주도에서 했던 말이다. 세상 분란을 일으킨 이번 6일을 통해 반기문이 그 통합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란 것만큼은 또렷해졌다. 사적 행사에 공적 일정 이용한 꼴 지금 국제사회가 안고 있는 시급한 현안들을 놓고 보면 반기문의 정치놀음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게다가 원칙을 말하자면 반기문은 사적 행사에 공적 일정을 이용했다. 정치인들을 만나는 개인적인 일을 몇몇 축사에 끼워 전세기를 비롯한 한국 여행 경비를 유엔한테 떠넘긴 셈이다. 표준을 보여야 할 사무총장 태도로는 아주 석연찮은 대목이다. 유엔 행정 개혁을 업적이라 여겨온 반기문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온갖 부정부패에다 관료적이며 무능한 조직’. 이게 바로 세계시민사회가 지녀온 유엔 인상 아니던가. 반기문은 지금 대통령 출마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미 늦었지만 “역대 최악 사무총장”이라는 국제사회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남은 임기 7개월이나마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그나마 마지막 의무다. 외신판에 떠도는 “보이지 않는 사람” “무능한 참관자” “시시한 사람” 같은 별명들이 왜 내 몸에 붙었는지 곰곰이 따져보면서. 반기문 동아리가 “서구 언론의 인종주의적 편견이다”라고 아무리 소리친들 밖에서는 들어주는 이가 없다. 스웨덴 출신 다그 함마르셸드도 오스트리아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도 서구 언론한테 맹폭을 당했다. 반기문 비판은 서구 언론뿐 아니라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언론에서도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베트남전쟁 패전을 언론 탓으로 돌린 미국 정부 흉내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외교관이 꿈이었던 소년 반기문은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그 최고 꼭대기인 유엔 사무총장까지 올랐다. 더 오를 데가 없다. 이제 깔끔한 뒷모습을 남기고 ‘떠날 때’를 꿈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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