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23 19:20
수정 : 2016.05.23 19:20
서울 강남역 살인 사건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살인 용의자 김아무개씨의 정신질환 유무가 문제가 되면서부터다. 논의의 가치가 없는 황당한 주장들을 배제하더라도, 김씨가 분명하고 심각한 정신질환을 가졌다면 그간 ‘여성혐오’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회적 공분은 새로운 입장정리가 필요하다.
며칠 전 지인에게 “이 사건이 곧 정신질환 문제로 이슈 전환이 시도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런 예언(?)을 한 까닭은 이 사건이 충격적이지만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고, 또한 쉽게 ‘정신질환’이란 말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지배권력(정부와 경찰)은 문제의 축소를 원하고, 이때 가장 쉬운 방식이 범죄자를 ‘정신장애인’으로, 그의 행위를 ‘병적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정신 분야 전문가들 역시 자신들의 전문성의 권위를 높인다는 점에서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협조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문제 해결 방식은 이번 말고도 그간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사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려운 사건이다. 김씨가 확실히 정신장애인이라면 그는 유죄 판결이 아니라 감호명령을 받게 된다. 또한 그가 사람을 죽인 이유로 들었던 ‘여성혐오’는 하나의 ‘병적 증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여성혐오’가 피해망상의 내용이 되었다는 점에서 작금의 여성혐오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만 ‘여성혐오’와 관련한 주장의 힘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해진다. 이후에는 정신장애인 치료체계 미비와 낙인 문제가 주된 이슈가 되어버릴 수 있다.(물론 대중은 이 이슈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인에 비해 범죄를 야기할 가능성이 훨씬 낮은데도 정신장애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게 만드는 이번 경찰의 발표나 대중매체의 보도방식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건의 파장이 이렇게 커지도록 만든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고, 이런 현상은 김씨의 정신장애 보유 유무와 하등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이 더욱 무서운 것은 아무도 이것이 ‘마지막 사건’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라면 그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언제든지 “그녀는 나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근원적인 처방을 내리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변화를 실제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여성뿐만 아니라 이주자, 빈곤자, 동성애자 등 사회·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제2, 제3의 ‘강남역 사건’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기에 강남역 사건의 가장 큰 비극성은 어쩌면 강자들의 비웃음과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약자(병자)에 의한 약자(여성)의 살인’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동족상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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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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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약육강식’의 논리와 청년실업 등 갈수록 커져가는 ‘사회 불평등’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큰 사회문제를 개인의 질병 문제로 과도하게 축소하려는 지배 권력의 교묘함과도 싸워야 하고, 이 과정에서 정신장애인의 인권도 함께 지켜야 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이것은 인류의 생존을 건 지난한 ‘진짜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약자들 간의 연대이다. 그래서 이 진짜 싸움의 슬로건은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란 철학자가 한 말이다. “우리 모두는 약자이자 소수자입니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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