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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0 19:04 수정 : 2016.05.24 14:24

강남역·신촌서 밤늦도록 발언
일상적 여성폭력에 질문 던져
여성단체가 이끄는 공론화 너머
시민들 자기 목소리로 해법 촉구

“여자 둘이 만나면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무섭고 익숙한 경험들인데….”

회사원 구민경(31)씨는 ‘강남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이 쉬쉬했던 ‘공포와 불안의 기억’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보고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했다.

‘보통 여성’들이 ‘여성 폭력’과 ‘여성 혐오’의 경험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젠더 이슈가 과거 여성운동단체 등에 의해 제기되어왔던 것과 달리, 평범한 여성들이 스스로 ‘일상 속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전날에 이어 20일 저녁에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의 촛불 추모엔 자연스레 여성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비슷한 시각 신촌에선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밤늦은 시각까지 진행됐다. 대부분 20~30대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지하철 여자화장실 옆칸에 한 남성이 화장실 바닥으로 몸을 눕혀 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친 뒤 한동안 지하철 화장실을 못 갔다.” “스물다섯. 새벽 1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낯선 남자가 두려웠다.”

‘강남’이라는 번화가의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엘리베이터·골목·놀이터·화장실·공원·택시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노출돼왔던 여성의 경험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열린 ‘여성 혐오 경험담’ 발언 자리 등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사건 발생 뒤 ‘강남역살인사건공론화’ 트위터 계정과 ‘강남역10번출구’ 페이스북 계정엔 수천명이 ‘팔로’나 ‘좋아요’를 눌렀다. “살아남았다”는 해시태그(#)가 달린 트위터 글은 이날 수천개를 훌쩍 넘었다.

전문가들도 이런 현상을 이례적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우리 사회의 여성 문제는 성폭력·살인 등 특정 사건 발생→여성단체의 공론화→제도적 대안 또는 여성 보호 담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과거 여성단체 중심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은 시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라며 “이번 사건이 ‘화장실법’ 같은 것들로 귀결될 게 아니라 여성들이 안전하고 일상에 위축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자생적으로 나오는 이 흐름은 한국 여성운동에서 90년대 영 페미니스트 운동에 이어 ‘제3의 물결’이라 봐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민감하고 예민한 여자”, “남자를 다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한다”는 비난에 시달리는 것이 두려워 자신들의 경험을 숨겨왔던 여성들이 최근 ‘여성 혐오’ 흐름 속에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공감을 느끼며 목소리를 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대학원생 정아무개(35)씨는 “지하철에서 성추행, 밤길에서 느꼈던 공포 등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며 진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승준 박수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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